“아들 울음소리에 눈앞 캄캄 내가 보이스피싱 당할줄이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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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요즘 서울 강남·서초구 일대에 자녀를 납치했다며 돈을 요구하는 보이스피싱 전화가 극성이다. 서초구 서초동에 사는 K씨(52·여)도 얼마 전 아들이 납치됐다는 전화를 받고 2000만원을 송금했다.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최근까지 중소 의류업체 CEO로 재직한 그는 “전화를 받으며 단 한 번도 가짜라고 의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나 같은 피해자가 없었으면 좋겠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의 얘기를 토대로 당시의 범죄를 재구성했다.

14일 오후 6시.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당시 집에는 나 혼자 있었다.

 “엄마. 나 OO이야. 나 칼에 찔렸어.”

 큰 아들 목소리였다. 아들은 울고 있었다. 성인이 된 뒤 그 애가 우는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모 대학 석사과정에 있는 아들은 분명 대학 연구실에 있어야 했다. 얼마나 아프고 놀랐으면, 군대도 다녀온 스물다섯 먹은 녀석이 울고 있을까 싶었다.

‘아들이 납치됐다’는 보이스피싱 전화에 속아 2000만원을 사기당한 K씨가 등을 돌린 채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김다혜 대학생 사진기자]

 이후 수화기를 건네받은 한 남자는 “동생들이 돈이 필요해서 애를 칼로 찔렀다. 2000만원을 보내면 병원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통장에 1000만원밖에 없다고 하자 일단 보내라고 했다. 남자는 중간중간 욕설을 섞어가며 누군가에게 “우회전해” “너 앞으로 가!”라고 외쳤다. 아들을 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가는 것 같았다. 남자는 “허튼 짓을 하면 아들을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너무 무서웠다. 이 사이 둘째 아들(21)이 집에 왔다. 혼비백산한 내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다가온 둘째에게 ‘형이 납치당했어. 경찰에 절대로 신고하면 안 돼’라고 메모지에 써서 보여줬다.

 곧바로 아파트 상가에 있는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로 달려가 알려준 계좌로 1000만원을 보냈다. 휴대전화로 남자와 계속 통화하며 지시를 받았다. 입금이 확인되자, 남자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 친구에게 1000만원을 빌린 뒤 다시 ATM기로 가라고 했다. “1000만원으로 봐주면 안 되느냐”고 애원하자 “아줌마 서초동 ○○아파트 ○층 사는 거 다 알아. 능력 되잖아”라는 싸늘한 답이 돌아왔다. 결국 친구에게 1000만원을 빌려 또 보냈다. 남자는 나와의 통화를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휴대전화 통화로 친구에게 돈을 빌릴 땐, 자신과 통화 중인 집전화 수화기를 바닥에 내려놓게 해 대화를 들을 수 있게 했다.

 2000만원을 보냈지만, 남자는 또다시 1000만원을 요구했다. 다른 친구에게 돈을 빌려 세 번째 송금을 하려던 7시 30분, 둘째 아들이 ATM기로 달려왔다.

 “엄마. 형이랑 통화했어. 그거 사기야.”

 아들은 바로 서초경찰서에 신고했고, 나도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찰서로 가는 차 안에서 돈을 송금한 은행에 지급정지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미 남자는 1800만원을 인출해 간 뒤였다. 얘기를 전해 들은 친구들은 “너처럼 냉철하고 이성적인 애가 보이스피싱에 당하느냐”며 놀라워했다. 나는 미국에서 3년간 유학한 뒤 30여 년간 사회생활을 해왔다. 이런 나도 속을 정도인데, 세상 물정에 어두운 노인분들은 어떨까 생각하니 보이스피싱이 정말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은행 지급정지 절차도 좀 더 간편해졌으면 좋겠다.

◆납치 빙자한 보이스피싱에 조심해야=서초서 관계자는 18일 “최근 자녀 납치를 빙자한 수법이 보이스피싱 조직 사이에서 다시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중산층 이상의 거주자가 많은 강남·서초구의 피해 발생 사례가 많으며, 신고자 중엔 의사·변호사도 있다고 한다. 강남서도 “최근 3개월 동안 피해 사례가 두 배 이상 늘었다”고 밝혔다.

글=송지혜 기자
사진=김다혜 대학생 사진기자

“아이 납치”

■ 보이스피싱 주요 수법은

▶국세청을 사칭해 세금을 돌려주겠다고 속이고
▶ 은행·경찰·우체국·금감원 등을 사칭해 개인정보가 유출됐다고 거짓말
▶자녀를 납치했다며 직접 돈을 요구

2006년 5월

■ 최초 피해 사례

▶ 2006년 5월. 국세청을 사칭한 사기전화 받은 피해자가 800만원을 송금한 사건

5455건 2010년 범죄 발생 건수

■ 연도별 범죄발생 현황(2006년 6월~2010년 12월)

▶2006년 6~12월 1488건▶2007년 3981건
▶2008년 8454건▶2009년 6720건▶2010년 5455건
(5년간 총 2만6098건, 피해금액 약 2592억원)

자녀 납치빙자 보이스피싱 전화 대처 TIP

-평상시 자녀와 가까운 친구나 자주 가는 곳 등의 전화번호를 확인해둔다.

-납치빙자 전화를 받을 경우 경찰에 신고한 뒤 평상시 확인해 둔 곳으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거나 자녀가 있을 만한 곳으로 가서 확인한다.

-특히 즉시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자녀가 납치 됐는지 여부를 떠나 신속하게 수사에 착수할 수 있고, 그만큼 범인 검거율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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