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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장 범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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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선시대 초기에 백정(白丁)은 도적(盜賊)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였다. 『성종실록』 곳곳에 “도둑질과 강도질은 거의 대개가 백정이 하는 짓이다” “백정은 거의 모두가 도적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니 백정들은 도난·강도 사건만 발생하면 도적으로 지목돼 쫓기는 신세가 되곤 했다.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백정을 농민화해 세수(稅收)를 늘리려고 도살 행위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그러자 생업을 잃은 백정들이 먹고살기 위한 ‘생계형 범죄’에 뛰어들었다는 거다.

 실직과 가난이 도둑을 만드는 현상은 동서고금을 떠나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미국 영화 ‘킹콩’의 배경은 1930년대 뉴욕. 영화 도입부에서 대공황이 몰고 온 살풍경이 묘사된다. 거리엔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역시 일자리를 잃고 헤매는 가난한 연극배우인 여주인공 앤 대로우가 과일을 훔친 것처럼 생계형 범죄가 잇따른다는 내용이다.

 요즘 우리 사회가 바로 그렇다는 소식이니 딱한 노릇이다. 살길 막막한 이들이 저지르는 ‘장발장’식의 생계형 범죄가 늘고 있다는 거다. 전선·맨홀 뚜껑·건축자재 같은 전통적인 절도 대상도 있지만 라면·우유·옷가지 같은 생필품을 훔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춥고 배고파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범죄인 셈이다. 1950년대 보릿고개 시절이 아니라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의 얘기다.

 생계형 범죄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명백한 범법 행위다. 그렇다고 “아무리 힘들어도 이래선 안 된다”고 하는 것만으론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가 없다. ‘사흘 굶어 남의 집 담장을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거나 ‘정승도 배가 고프면 담을 넘는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오죽하면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빵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복역하고 나와서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밀리에르 신부의 은촛대를 훔쳐야 했을까.

 법무부가 생계형 범죄에 대해 벌금을 절반 가까이 깎아 구형하거나 기소유예를 확대하는 정책을 내놓은 적도 있지만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기 십상이다. 면죄부를 주는 식으로는 범죄를 조장할 뿐이다. 그보단 빈곤층을 줄이고,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짜는 예방적 처방이 먼저가 아닐까. 북한도 최근 식량난으로 인한 생계형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 큰 사회문제라고 한다. 우리 사회의 현대판 백정·장발장을 방치하면 그들 입에서 “북한보다 나을 게 뭐냐”는 소리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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