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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위협하는 나라빚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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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해럴드 제임스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유럽연합(EU)의 재정 위기는 유로화뿐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근본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현재 유럽의 근심은 그리스·아일랜드·헝가리 등 비교적 작은 나라들에 국한돼 있다. 이들 정부는 모두 민주적 계약의 기본 원칙들을 지키지 않고 있는 듯하다.

 헝가리의 경우 빅터 오르반 총리의 헌법 개정과 언론자유 억압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EU 의장국이 된다. 재정 파탄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이 나라는 그로 인한 정치적 파장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세계 최고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고 화폐 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진 것이 공산 독재정권이 들어서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재정 건전화를 통해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다시 자금 지원을 받을 순 있다. 그러나 시장 불안이 지속되고 금리가 높게 유지되면 부채 부담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를 것이다. 따라서 EU로선 이들 국가의 부채를 어떻게 줄여갈지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유럽중앙은행의 일부 이사회 멤버들은 이들 국가의 부채 탕감에 반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입장이다. 공적 부채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원칙은 법적 안정성, 대의 정부, 민주주의의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방탕한 스튜어트 왕조를 몰아낸 명예혁명 이후 영국 정부는 국가 부채와 관련해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의회에서 예산안에 대해 투표를 실시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근대 초기 전제국가들의 상징이었던 왕실의 사치스러운 소비와 모험적 군비 증강의 여지를 줄였다.

 명예혁명의 교훈은 이후 더욱 빛을 발했다. 혁명 발발과 나폴레옹의 등장 이후 프랑스는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다. 그래서 재정 조달을 위해 ‘아시냐’라는 지폐를 대량 발행한 결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혁명 정부의 공신력도 추락했다. 빈 회의에 의해 루이 18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른 뒤 그의 보좌관들은 나폴레옹이 발생시킨 부채를 인정할지 논쟁을 벌였다. 결국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프랑스 경제에 법적 안정성을 부여해 영국의 산업혁명을 따라잡을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다.

 일부 유럽국가들의 재정은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많이 닮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누구나 집을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줬고 이를 규제할 어떤 규칙도 없었다. 예컨대 2008년 9월 아일랜드 정부는 자국 은행들이 부실채권에 시달리자 은행을 국유화하거나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 적자 비율이 32%에 달하는 등 나라 살림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브라이언 코언 아일랜드 총리는 이에 대해 다음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아일랜드 정부의 결정은 납세자들의 부담과 정부의 책임 간의 신뢰관계가 무너진 대표적 사례다.

 EU 회원국들의 국가 부채 일부를 유럽 채권 발행을 통해 떠안는 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EU의 납세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떠안는 것인지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결코 무책임한 정부의 무책임한 재정 운용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책임을 떠안아선 안 된다.

해럴드 제임스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정리=정현목 기자 ⓒProject Syndi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