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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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7

그 남자를 만난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주차장 청소를 하려고 나왔는데 샹그리라 현판을 등지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작은 남자였다. 키만 작을 뿐 아니라 체구도 작았다. 병약한 소년 같았다. 남자는 피켓 하나를 들고 있었다.
“제 딸을 돌려주세요, 제발요!”

피켓엔 굵은 매직으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스스로 만든 피켓인가 보았다. 합판을 잘라 각목에 못을 박아 만든 솜씨가 투박하고 거칠었다. 남자는 내가 다가가자 피켓으로 얼굴을 가렸다. 수줍음이 많거나 아니면 심약한 사람이었다. 비탈길은 간밤에 흩뿌린 눈이 더러 바람에 날려가고 더러 얼어붙어 히끗히끗했다.
“뭡니까?”
“…….”
“여기 이렇게 서 있으면 안 돼요. 뭔가 잘못 알고 찾아오셨나 봐요. 딸이라니 대체 뭔 소리요? 얼른 딴 데로 가세요!”
“이사장님……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내 위세에 눌렸는지 한 발짝 물러나며 남자가 웅얼웅얼 말했다.

이사장이라는 말이 귓속에 공명됐다. 이사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곳에 또 있지 않으니 잘못 찾아온 건 아닌 듯했다. 간밤에 이사장은 늦게까지 샹그리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가끔 그랬듯이, 간밤에도 아마 ‘명안전’에서 잤을 터였다. 게다가 딸을 돌려 달라는 남자의 요구도 오리무중이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인지도 몰랐다. 처음 명안진사에 불려갔던 날, 백주사가 당부했던 말이 그때 생각났다. 샹그리라는 ‘사적 공간’이니 그 누구에게도 이사장이 샹그리라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고 했다.

“여긴 이사장이라든가, 그런 사람 없어요!”
나는 시치미를 떼고 일단 으름장을 놓았다.
김실장이 주차장으로 나온 것과 김실장을 실어가려는 노과장의 차가 비탈길을 올라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남자를 발견한 김실장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나는 김실장에게 채근을 당할까 봐 짐짓 앞으로 나가 남자의 한쪽 어깨를 잡았다. 남자의 어깨는 너무 연약해서 힘을 주면 그대로 바스라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두어 걸음 더 뒤로 물러선 남자의 등이 샹그리라 현판에 닿았다.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이 양반이 또…….”
김실장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김실장과 노과장은 남자를 아는 눈치였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누가 주차장으로 나오는 발소리가 났다. 노과장이 달려들어 남자의 어깨를 싸안으며 피켓을 빼앗으려 했고, 남자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용을 썼다. 주차장을 나선 사람은 207호실의 젊은 순경이었다. 김실장이 헛기침을 크게 날리며 젊은 순경에게 아는 척을 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젊은 순경이 인사치레로 물었고 내가 대답했다.

김실장이 때맞추어 관자놀이에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머리가 돈 사람이라는 신호였다. 젊은 순경은 남자를 힐끗 일별하고 나서 “그럼…….” 하고, 곧 비탈길을 내려갔다. 미처 빼앗지 못한 피켓은 노과장이 우격다짐 뒤로 돌려버렸기 때문에 젊은 순경이 돌아보았을 때는 아무 글자도 없는 피켓의 뒤쪽이 앞을 향하고 있었다. 아침 햇빛이 뚜벅뚜벅 절도 있는 걸음새로 비탈길을 내려가는 젊은 순경의 어깨에서 빛났다. 전라도 장흥이 고향이라는 젊은 순경은 성이 최씨로, 관음동파출소가 첫 근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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