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전략적 이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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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오영환
외교안보 데스크

김정일의 올 대남 공격은 김일성의 6·25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의도·규모·성격에서 둘은 비교가 안 된다. 하지만 닮은 구석이 적잖다. 6·25는 엄밀히 따지면 동북아 전쟁이다. 전장의 주역은 남북만이 아니었다. 미·중이 처음으로 정규전을 벌였다. 미국은 첨단 무기를 총동원했고, 중국은 인해전술로 맞섰다. 중국군 투입 병력은 연 500만 명이었다. 중국군의 항미원조(抗美援朝)는 한반도와 국제관계를 뒤바꿔 놓았다. 남북 분단을 고착화한 정전체제가 탄생했다. 미국의 대중 봉쇄는 20년간 지속됐다. 동서 냉전의 전선은 전 세계로 확대됐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적이 동지로 바뀌었다. 일본이 재무장의 길을 걸었다. 군비 경쟁의 막이 올랐다.

 김정일의 천안함·연평도 공격의 초점을 넓혀 보자. 동북아 정치지도를 바꿨다. 무역과 환율의 양자 문제에서, 비확산·온난화 방지의 다자 문제에서 금이 간 G2(미·중) 갈등의 골을 깊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동북아에서 ‘협력적 G2’는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버팀목이었다. 유엔에서, 국제 무대에서 북한을 두둔하고 대변했다. 국제사회의 비난, 대국의 체면은 뒷전이었다. 신생 중국의 마오쩌둥이 국민당 토벌·경제 파탄에 아랑곳하지 않고 참전했던 것과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은 항모를 동·서해로 보냈다. 북·중 군사교류가 부쩍 늘었다. 중국은 일본과 영유권 분쟁도 불러일으켰다. 미국은 아시아 결속에 나섰다. 느슨한 대중 포위망이다. 중국의 항모 건조 계획이 공개됐다. 일본은 탱크를 줄이고 함정을 늘리는 방위계획을 내놓았다. 러시아에서 중국으로의 타깃 이동이다. 새로운 편 가르기와 군비경쟁이 시작됐다. 6·25 60주년인 올해 ‘1950년 체제’가 작동한 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닐 수 없다.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은 비극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김정일은 이런 사태 발전을 예견했던 것일까. 그렇다고 봐야 한다. 중국을 읽는 데 북한만큼 동물적 감각을 가진 나라는 없다. 김정일은 미·중 관계가 뒤틀어지자 중국이 동맹을, 완충지대를 필요로 할 것으로 봤는지 모른다. 세력균형 싸움에서의 ‘수(數)의 논리’다. G2 협조관계는 북한의 생존에 득보다 손실이 크다. 고도(孤島)가 될 수 있다. 부시 행정부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중국과의 협조로 북한 정권교체를 추구해야 한다는 정책 메모까지 작성하지 않았던가. 김정일의 대남 도발은 미·중 관계에 쐐기를 박았다. 김정일은 중국에 바짝 붙었고, 중국은 그를 감싸안았다. 김정일은 5월과 8월 두 차례 방중길에 올랐다. 전 세계의 대북 규탄 속 북·중 연대의 과시였다. 10월의 노동당 창건일 군사 퍼레이드 때 김정일은 저우융캉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과 주석단을 돌면서 그의 손을 잡고 들어올렸다. 낯뜨거운 연출이었다. 그 보름 후, 평남 회창군 마오안잉의 묘소를 참배했다. 마오안잉은 6·25 때 김일성이 보낸 달걀로 볶음밥을 만들려다 폭사한 마오쩌둥의 장남이다. 후계자 김정은과 당·군의 간부가 무더기로 김정일을 수행했다. 김정일은 연평도 공격(11월 23일) 다음날 중국이 지어준 대안친선유리공장을 찾았다. DNA는 속이지 못하는가. 중·소의 틈바구니에서 줄타기를 해온 김일성 못지않다.

 김정일의 대남 도발은 김정은 후계와 맞물려 있을 수도 있다. 전시동원 체제로 3대 세습 비난의 싹을 잘랐다. 김정은의 ‘업적’도 만들어 주었다. 북방한계선(NLL)도 흔들었다. 아무리 선군정치라 해도 천안함·연평도 공격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닐 듯싶다. 체제 생존 확보, 김정은 후계 안착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김정일이 핵문제에서 유화 제스처를 흘리면서 국면 전환을 꾀하는 것은 재래식 공격의 일단락을 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계(奸計)는 후유증을 남기는 법이다. 북한은 올해 몸집의 몇십 배가 넘는 국력과 외교력을 구사했다. 김정일의 정신력도 소진 지경일 것이다. 중국도 질릴 때가 됐다. 한·미·일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미·중 협력은 양국과 세계의 이익이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북·중 사회주의 동맹은 좌표축을 잃을지 모른다. 동맹은 공동의 적과 신뢰가 없으면 무너진다. 도발에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 북한이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길을 택했다는 점을 일깨워줘야 한다. 전략적 인내는 소극적이다. 북·중 동맹에 대한 전략적 이간에 나설 때가 됐다. 대한민국은 그 명분과 설득력, 경제력을 갖고 있다.

오영환 외교안보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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