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인왕산자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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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신인왕제색도

이갑수 글, 도진호 그림

궁리, 356쪽, 1만8000원

영화 ‘스모크’(웨인 왕 감독, 1995)에서 브루클린의 담배가게 주인인 주인공은 13년 동안 매일 오전 8시,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길을 촬영한다. 반복되는 일상처럼 언뜻 사진의 풍경은 다 똑같아 보였지만, 한결같이 다른 순간들이었다.

 이 책은 인왕산 기슭에 자리잡은 출판사 ‘궁리’의 대표인 지은이가 영화 ‘스모크’의 주인공처럼 인왕산과 인왕산자락 동네 사람들, 서울의 일상을 기록한 산문집이다. 책과 거문고를 좋아하고, 막걸리를 즐기고, 산을 좋아하는 그는 2009년 10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월·수·금요일 매일 등산화를 신고 인왕의 골짜기를 탐험하듯 오르고, 인왕산 아래 동네 골목을 누볐다.

『신인왕제색도』에 담긴 인왕의 산자락과 동네의 모습은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렸던 자리에서 찍었다. 사진은 지난 3월 8일 눈 덮인 풍경. [궁리 제공]

 산에서는 나무에 마음을 걸어놓고 말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여름 계곡에선 얼굴을 씻고, 비가 오는 날엔 소나무 아래서 비를 그었다. 그가 그려낸 장면은 우직하기 짝이 없다. 놀라우리만치 다 똑같아 보이는 장면이라는 점에서다. 하지만 소름이 돋을 만큼 섬세하기도 하다. 도드라져 보이지 않지만 안개와 바람, 빗줄기와 뭉게구름, 잿빛하늘, 새파란 하늘 등 “하늘의 조명에 따라 무한 변주되는” 인왕산 모습을 1년 내내 담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지은이는 산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치 세필화로 그려내듯 글로 기록했다. 지은이의 섬세하고 정다운 시선은 이 대목에서 빛난다. 청국장의 향기가 기가 막힌 사직분식, 따끈따끈한 가래떡을 뽑아내는 통인시장의 부여떡방앗간, 간판도 없는 손칼국수집, 만선 쭈꾸미집 묘사에 묻어난 사람들 이야기는 ‘2010년 서울의 귀한 삽화 모음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왕의 아름다움을 넘치도록 섭취”하고, 스쳐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며 매일 제자리 걸음 같으면서도 실상은 온갖 변화를 겪고 있는 우리 삶의 한 순간을 어루만진 것이다.

 지은이는 남산을 중심으로 한 서울풍경을 기록한 『인왕산일기』도 함께 펴냈다. ‘관찰’이라는 행위에 담긴 따뜻하고 큰 힘을 돌아보게 해주는 책들이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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