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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조선에 귀순해 충성을 다한 일본인 김충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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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김충선을 모신 녹동서원(鹿洞書院). 임진왜란 당시 귀순해 병자호란 이후까지 조선을 위해 공을 세웠던 김충선은 정헌대부에 녹훈되었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있다. [사진 제공=후손 김상보씨]

‘항왜(降倭)’란 조선에 투항하거나 귀순한 일본인을 가리킨다. 항왜는 조선 초부터 있었지만 그 존재가 확실히 부각된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나타난 항왜들의 유형은 조선에 귀순해 공을 세운 자, 포로가 되거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낙오한 자, 부상을 입거나 병에 걸려 방치된 자 등으로 나눠진다.

 항왜는 조선군에 편입돼 전투에 참여하거나 정보원으로 활약하기도 하고, 조총이나 화약 제조법 등을 전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항왜 중에는 용맹함과 충성심이 남다른 사람이 많았다. 이 때문에 1618년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하러 출병했던 강홍립이나 1624년 반란을 일으켰던 이괄은 휘하에 항왜들을 편제해 활용했다. 특히 ‘강홍립 휘하의 항왜들은 후금에 투항하는 것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원 옥쇄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항왜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연 김충선(金忠善·1571~1642)이다. 본래 이름이 사야가(沙也可)였던 그는 1592년 4월 조선에 상륙한 직후 귀순했다. ‘무고한 조선 백성들을 살육하지 않으려고’ ‘평소 중화의 문물을 사모했기에’ 귀순했다고 한다. 김충선은 이후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공을 세우고 조선인들에게 조총과 화약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조선 정부는 그의 공을 인정해 첨지(僉知) 벼슬에 제수하고 김씨 성을 하사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김충선의 활약은 이어졌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항왜 서아지(徐牙之)를 사로잡았는가 하면, 1627년 정묘호란에도 참전했다. 그리고 1643년 10월 외괴권관(外怪權管)이란 직책에서 물러날 때까지 변방에서 근무했다. 김충선은 귀순 이후 이렇게 ‘새로운 조국’에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 여인과 결혼해 대구 인근의 우록동(友鹿洞)에 터를 잡아 완전한 조선인으로 뿌리를 내렸다.

 식민지 시대 일본인 관리나 학자들은 김충선의 존재를 부정하려 했다. 일본인 학자 중에는 우록동을 방문해 김충선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기록들을 직접 조사했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김충선을 일본인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혼혈아’나 ‘가공의 인물’로 치부했다. 1930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수관(編修官) 나카무라(中村榮孝)의 조사 이후에야 비로소 김충선이 실재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공인된다. 최근 일본의 와카야마현에 김충선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명분 없는 침략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돌아섰던 평화주의자 김충선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