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덕 고려대 교수, ‘3개월 시한부 삶’ 이겨내고 노숙인 돌보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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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정창덕(컴퓨터정보학) 교수가 9일 경기도 양평의 노숙인 쉼터에서 사육 중인 오골계의 알을 살펴보고 있다. [한은화 기자]


9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의 한 비닐하우스. 자그마한 체구의 윤모(63)씨가 병아리실에 들어서자, 30마리의 병아리가 “삐약삐약” 울기 시작한다. 윤씨는 능숙한 솜씨로 온도·습도를 확인하고 먹이를 준다. 그는 “오전 4시 반에 일어나 하루 종일 100여 마리의 오골계를 돌본다”고 했다. 비닐하우스 근처의 언덕배기에는 ‘서울특별시립 양평쉼터’라 쓰인 오렌지·흰색의 건물들(8264m²)이 늘어서 있다. 윤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서울역 앞을 헤매는 노숙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돈을 모아 자립해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고 있다.

 윤씨에게 꿈을 안겨준 사람은 고려대 정창덕(50·컴퓨터정보학) 교수다. 그는 2000년 사재 10억원을 털어 폐교를 구입해 노숙인 재활을 돕는 보호시설인 쉼터를 만들었다. 현재 쉼터에는 노숙인 135명이 머물고 있다. 몸이 아픈 사람은 요양하고, 성한 사람 40여 명은 윤씨처럼 일을 한다.

 한국유비쿼터스학회장이기도 한 정 교수가 쉼터장·목사님이라고 불리는 것은 백혈병이 계기였다. 14년 전 정 교수는 감기로 병원을 찾았다 의사에게서 ‘남은 생은 3개월뿐’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이었다. 36세에 대학교수가 돼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매일 6~10명분의 혈소판을 수혈받고, 2년여를 휴직하며 투병생활을 했다.

 생사의 문턱을 오가는 중 깨달음이 왔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변이 도와줘서 여기까지 왔다’. 그는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국과학기술대(현 KAIST)에서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도움을 줬던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병이 완치될 무렵 노숙인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1998년 노숙자 재활 캠프를 경기도 양평군에서 열었다. 70여 명의 노숙자와 함께 3박4일을 보냈다. 그 자리에서 노숙자들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후 부인 김혜린(50)씨가 팔을 걷어붙였다. 남편의 병간호를 위해 애완용품 사업을 접은 그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 쉼터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쉼터를 운영하는 데 어려움도 많았다. 조용한 시골에 노숙인이 몰려들자 주민들이 반발했다. 정 교수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항의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치안을 걱정하자, 쉼터 식구 중 15명을 ‘방범대원’으로 뽑아 순찰을 맡겼다.

 서울시에서 직원 10여 명의 인건비·식비 등을 지원받고 있으나 부족하다.

 쉼터의 재활 프로그램 ‘웰빙 농활단’ 프로젝트는 지난해 ‘참살이영농조합법인’으로 거듭났다. 올해는 노숙인 쉼터 최초로 서울시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받았다.

 정 교수는 요즘도 일주일에 이틀을 쉼터에 머물며 노숙인들과 함께 생활한다. 쉼터를 확대해 노숙인 타운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양평=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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