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간층과 여자 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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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

올해 북한에서는 간층(間層)이란 단어가 새삼 떠돌았다. 성분에 따라 분류된 기존의 계층들 ‘사이의 계층’이라는 뜻이다. 간층이 없던 용어는 아니다. 독자적인 계층을 이루지 못한 사회적 집단으로 정의되며, 인텔리 계층의 양면성을 비판할 때 사용되던 말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일상생활에서는 잊혀졌다. 그러다가 이번에 등장한 간층은 시장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만큼 시장이 커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다양한 여자 바지는 올해 북한 최고의 유행상품이다. 지난 수십 년간 여자는 으레 치마를 입어 왔다. 여성에게는 치마가 어울린다는 김정일의 말 한마디가 치마 착용을 일상화시켰다. 물론 바지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과잉충성이 넘쳐나는 북한에서 ‘장군님 말씀’은 바지에 대한 지나친 규제로 이어졌다. 여성의 바지는 자본주의 황색바람의 상징으로 읽힌 까닭도 있다. 최근에는 여성의 자전거 금지와 함께 시장 활동을 억제하는 방편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장이 커가는 만큼 장사의 주역인 여성의 불만은 높아갔고, 드디어 바지 규제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지난 8월 노동신문은 바지를 입되 ‘단정한 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결국 여자 바지는 대유행이 되었다. 심지어 중국을 통해 최신 스타일의 남한 제품까지 들어갔다.

 간층과 여자 바지는 북한 사회에 일고 있는 변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시장의 확산이 존재한다. 당연히 북한 당국은 불안하다. 더욱이 현재 시점은 대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이므로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다. 2012년 건설을 약속한 강성대국은 ‘사회주의’ 강성대국이다. 그러나 오히려 사회주의는 무너지면서 자본주의가 싹트고 있다. 사상 유례 없는 3대 세습도 ‘우리식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혈통 계승이어야 한다는 논리이지만 현실에서는 시장이 계획을 압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내부적 불안이 연평도 포격 사건의 한 원인일 것이다. 사실 현재 북한은 강경 모드를 취할 충분한 유인을 가지고 있다. 강경 모드를 통해 내부적으로 공포와 위험 분위기를 조장함으로써 당국의 통제력을 최대화하는 동시에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세습에 대한 반발과 혼란 가능성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김정일의 건강 악화와 어린 아들로의 세습이라는 정치적 취약기에 북한 체제를 흔들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대 우방인 중국이 한반도의 안정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도 강경 모드를 선택할 유인을 강화하고 있다. 현재의 국면은 북한이 강경 모드를 취할수록 중국은 북한을 더욱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후계자 김정은의 ‘업적 쌓기’를 위해 무력행사라는 강경책을 사용할 유인도 존재한다.

 그러나 북한이 강경 모드를 취할 유인이 있다고 해서 연평도 포격 사건과 같은 도발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결국 북한의 최고 지도부가 이 시점에서 이와 같은 초강경책을 감행할 정도로 내부적 절박함이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북관계는 대응과 관리의 양면으로 접근해야 한다. 군사적 도발에는 철저하고 단호하게 대응함과 동시에 향후의 한반도 정세와 우리의 국익을 고려하는 관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응에 대해서는 이미 숱한 각오와 논의들이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11월 29일 담화를 통해 앞으로 북한의 도발에는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12월 4일 신임 국방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추가적인 도발에 대해서는 즉각적이고도 강력한 대응으로 북한이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심한 관리도 필요하다. 우리 내부적으로는 불필요한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고, 북한의 도발이 우리 경제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관리해야 한다. 대외관계의 관리도 중요하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는 북한의 내부 변화에 상응하는 면밀한 관리가 있어야 한다. 간층이 주층(主層)이 되고 청바지에 레깅스까지 유행하는 날, 북한 체제의 변환은 불가역적이 될 것이고 통일은 그만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대응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다. 확고한 대응과 치밀한 관리. 그것이 예측할 수 없는 북한을 다루는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한반도의 미래를 이루어 가는 방안이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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