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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대중운동가로 변신한 시인 박노해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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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해는 중천에 떠 있는데 우리는 이제 일출을 맞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내부 개혁속도와 세계 변화속도간의 시간차 싸움을 하고 있어요.”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시인 박노해씨(41)
는 “포기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없느냐”는 물음에 “노동의 소중함, 힘없는 자 우선 등 첫 마음은 조금도 변치 않았지만, 세계의 변화 속도에 비하면 나의 변화는 너무 늦었다”고 털어 놓았다. 박노해-. ‘대중운동가’로의 그의 ‘변신’에 대해 386세대의 어느 교수는 “‘노동의 새벽’을 읽으며 속으로는 섬뜩해 하면서도 겉으로는 높이 평가하던 내가, 이제 (그가 감옥에서 펴 낸)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읽으며 속으로는 감동하면서도 겉으로는 ‘박노해도 갔군’하며 빈정거린다”고 고백했다.

─시대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주식투자도 해 볼 생각이라면서요? 주식시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봅니까?

“세상 변화를 빨리, 민감하게 알아야겠는데 공부를 해도 실감이 잘 안 납니다. 주식투자는 분명 투기적 성격을 띠고 있고 불건전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기업이 돌아가기 위해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종의 필요악이죠. 돈이 한 푼도 없지만 여유가 생기면 빌려서라도 1백만원 정도 해보고 싶습니다.”

─어느 종목을 사고 싶습니까?

“인터넷주, 미래산업 같은 건강한 기업, 재벌기업에도 투자를 하면서 주가 변동에 대해 연구를 해 볼 참입니다. 말하자면 학습이죠.”

─어떤 기업이 건강한 기업인가요?

“내부고객인 종업원과 이익을 잘 나누고 민주적이고, 노조활동 보장하고, 환경친화적이고, 연구개발에 힘쓰는 기업들이죠.”

─강연 수입, 인세만 해도 꽤 되지 않나요?

“사실 강연도 경영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효율경영이죠. 일하는 사람들, 힘 없고 작은 곳, 서울보다 지역, 운동단체들을 우선하다 보니 결식아동, 실직자, 노동현장 등을 찾을 땐 강연료는커녕 라면 박스라도 사들고 가게 됩니다.”

─적자경영이네요?

“가치경영이란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그게 효율경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테크는 어떻게 보나요?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필요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이 버는 것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건강, 자녀들과의 대화, 독서·공연관람 등을 통한 자기 개발과 심미안을 기르는 데 쏟는다면 더 행복해 지지 않을까요? 울산에 노조 초청으로 내려가 노동자·주민들과 대화모임을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IMF 실직’으로 다들 죽겠다고 야단인데 30대 초반의 한 주부가 이런 얘기를 들려 주더군요. ‘월수 2백만원의 기술자인 남편이 실직한 지 1년 됐다. 지난 1년 동안 4백만원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등산·산책에 남의 농사일을 거들다 보니 건강이 좋아졌다. 남편과의 사이도 좋아지고, 아이와의 대화시간이 늘어 아이를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무료인 문화강좌도 많았고 단돈 2백원이면 비디오와 책을 빌려 볼 수 있었다. 이 자리도 그렇게 빌린 책을 통해 박시인을 알게 돼 오게 됐다. 남편은 이 행복이 꺼지지 않는 범위에서 재취업할 생각이다. 월 30만원을 벌더라도 이 행복을 놓지 않겠다.’ 그녀가 얘기를 마치자 다들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돈이 되는 운동’을 하겠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경영 마인드가 있는 시민운동, 책임경영하는 운동을 하겠다는 겁니다. 세상의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다 보면 재정문제에 부닥칩니다. 생계보장이 안 되다 보니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하는 거죠. 국민 앞에 얘기한 건 책임을 져야 하는데 말이에요. 의지와 용기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죠. 김밥 할머니, 평생 삯바느질한 할머니가 그렇게 모은 돈을 운동단체가 아니라 대학에 기부하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대학은 오랜 세월 지속돼 오는 동안 검증이 됐기 때문이죠. 시민단체에 가입해 회비도 내고, 자원봉사도 하고, 기부금도 시민단체에 내는 날이 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운동가들도 경영의 전문가가 돼야 하구요.”

─시장경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장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계획경제에 반대하듯이 시장에 모든 걸 맡기는 시장경제만능주의도 배격합니다. 자본주의는 헤어날 수 없는 근본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빈부격차, 무한경쟁에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 하고, 큰 불황과 같은 파국의 위험성을 안고 있죠. 잘 나가지만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다고 할까요? 이런 모순들을 직시하면서, 시장의 성화(聖化)
를 통해 공동선·나눔 같은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가치들을 살려내야 합니다.”

─정리해고는 어떻게 보나요?

“지금 시점에서의 정리해고엔 반대입니다. 사회복지가 제대로 안 돼 있기 때문이죠. 지금의 사태는 노동자의 책임이 아니라 재벌총수의 책임입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거부할 순 없지만, 사회복지 시스템이 전무한 상태에서의 정리해고는 비인간적이고, 경제성장의 목표가 무엇인지 회의하게 만듭니다.”

─‘제3의 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본주의의 역동성, 사회주의의 노동자 등 약자 우선의 정신을 살리려고 한다는 점에서 제3의 길은 포지티브한 사고방식입니다. 두 길에서 좋은 점만 취하겠다는 거죠. 그러나 그 길이 옳은 길인지는 그 나라 역사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따라 판단할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3의 길은 이념이라기보다 한시적인 정책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럼 제3의 길이 우리의 길이냐? 나는 아니라고 봐요. 우리나라는 30년 동안 시장경제의 논리가 우선한 나라예요. 오른쪽 날개가 왼쪽 날개에 비해 너무 커 졌어요. 이 상태에서 중간 잡기를 했다간 제대로 날아 보지도 못하고 추락하고 맙니다. 지금은 과거 압축성장 과정에서 방치돼 온 것들을 압축성숙시킬 때입니다. 노동운동을 육성하고 사회복지를 발전시키고 민주개혁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른바 IMF 사태를 우리가 왜 맞게 됐다고 봅니까?

“경제성장 제일주의, 박정희주의의 파탄입니다. 성장제일주의에 YS정부보다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봐요. 경제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편 치명적인 파탄의 독소를 품고 있었던 거죠. 재벌체제와 그것이 부른 경제력 집중, 관료독재와 그로 인한 부정부패, 민주주의·노동운동의 탄압, 문화적 자유와 창의성의 봉쇄, 세계화·정보화의 억압, 유일 지식의 강요 등으로 세계변화에의 적응이 너무 늦었고, 결국 IMF를 불러들인 겁니다.”

─북의 김정일 체제를 어떻게 봅니까?

“북한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된 까닭은 항일 독립투쟁 과정에서의 정통성, 일제 잔재의 청산, 민족 자주성 옹호, 지도자의 도덕성 등의 면에서 북이 상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시작보다 결과예요.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국민의 생각·정보·지식을 모두 봉쇄하는 닫힌 주체성으로는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어요. 국민들이 직접 변화를 접하고 체험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게 진정한 주체입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인 아이들이 굶어죽고 시들어 가는 건 정말 큰 문제예요. 10년 안에 중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고 미중 패권구도가 될 겁니다. 남북은 서로의 장점을 살려 흡수통일도 적화통일도 아닌 조화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실전학습’으로 1백만원 정도 빌려 주식투자를 해 보고 싶다는 그는 97년 감옥에서 펴 낸 ‘사람만이 희망이다’의 인세 2천만원을 북한에 보냈고, 최근에 낸 새 책 ‘오늘은 다르게’의 인세도 ‘굶는 아이들 한 끼 국수값이라도 하라’고 북에 보낼 생각이다. ‘얼굴 없는 시인’시절 “나를 온전히 세상에 바치겠다”는 결단으로 동원 훈련장서 정관수술을 받은 그는 최근 나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고 밝혔다.

“아이와 산을 오르고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고, 길거리 농구도 하고, 락 콘서트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손잡고 목욕탕에 데려가 살도 비비고 싶구요. 아이를 낳는다면 많은 삶의 체험을 물려 주고 싶습니다. 삶의 목표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 신앙, 책 읽는 습관, 부지런히 노동하는 자세…. 하지만 지난 시대의 짐이 많이 남아 있고, 내 아이 말고도 사랑해야 할 아이들이 많아요. 아내도 해야 할 공부와 일이 있구요. 요즘은 장애아라도 입양해 사랑을 줘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필재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economist.joongang.co.kr) 제 506호 199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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