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 탐사] 북한의 역사 상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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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호 02면

북한은 공포를 판다. 공포를 상품화한다. 공포 상품은 핵무기다. 핵·미사일 실험으로 위협하고 원조를 받는다. 거덜난 폐쇄경제의 생존 방식이다. 북한은 역사 상품도 내놓는다. 중국과 관계에서 특히 그렇다. 그 상품에 의리와 자존심을 넣어 장사한다.

지난달 말 끝난 상하이 엑스포에 북한(조선관)도 참석했다. 전시물은 빈약했다. 그 초라함 속에 의미심장한 기념품은 있었다. ‘조·중 친선은 세기를 이어(朝中友誼 世代相傳)’라는 화보집이다. 북한은 수퍼노트(위조 달러) 제조의 의심을 받는다. 그 의혹을 떠올릴 만큼 화보집 컬러와 편집은 세련됐다(34×26㎝, 240쪽). 항일투쟁, 국공내전, 한국전쟁, 그후 북·중 친선을 사진으로 엮었다. 우리말과 중국어 설명문이 달려 있다. 항일, 한국전쟁은 북·중 동맹을 과시할 때 인용한다. 그런 상투적 대목만 있다면 책 가치는 호기심 정도다.

그 화보집은 달랐다. 흥미 넘치는 정보를 담고 있다. 중국의 국공(國共)내전 때 북한 주석 김일성의 지원 대목이다. 내전은 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과 국민당 장제스(蔣介石)의 싸움이다. 일제 패망 후 승자는 마오였다. 그 책은 만주(동북 3성)전선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북한 지원임을 강조한다. 내용(‘중국 인민의 동북해방전쟁을 도와’)은 이렇다.

북한이 국공내전 당시 마오쩌둥에게 지원한 군수물자. 10만 정의 일본제 99식·38식 소총(오른쪽)과 모포, 신발, 황색 폭약 등이었다. <평양 조선혁명박물관 소장품>

“김일성 주석께서는 1946년 봄 모택동 주석의 특사로 평양에 온 동북국 부서기 진운(陳雲)을 접견하시였다···그는 무기를 해결해 달라고 했다. 승낙하시였다··중국 혁명이 큰 시련을 겪고 있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조선에서는 정규무력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무기였다. 이런 형편에서 10만 정의 무기를 무상으로 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색폭약도 생산하여 보내 주시였으며··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지원하는 것은 숭고한 국제주의적 의무다.”

10만 정 무기는 일본군 99식, 38식 소총이다. 일본군(함북 나남 주둔)으로부터 노획한 것이다. 그 책은 특별한 비사(秘史)를 털어놓는 듯 긴박감 있게 편집했다. 항일투쟁에서 김일성 역할의 과장 논란은 계속된다. 국공내전 부분은 다르다. 상대가 있는 만큼 사실에 근거했을 것이다. 지난 8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이렇게 언급했다. “김일성 주석은 중국 혁명승리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것은 북한의 대중국 자존심의 근거다.

국공내전 때 북한의 역할은 간헐적으로 알려졌다. 이번처럼 화보집으로 본격 소개, 판매된 적은 없다. 그 의도와 메시지는 간결하다. 너희가 어려울 때 도와줬으니 지금 도와 달라는 것이다. 선대 시절 역사의 부채(負債)의식을 가지라는 통보다.

그 메시지 효력의 한계는 뚜렷하다. 중국은 한·미, 미·일 동맹을 의식해 북한을 밀어준다. 북한과의 의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전략적 실리가 깔려 있다. 중국 리더십의 원형은 실용이다. 18년 전 중국은 북한을 버렸다.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의리보다 실리를 선택했다.
북한은 불안하다. 중국이 김정은 3대 세습의 장래를 명쾌하게 보장할 수 없다. 중국의 신세대, 젊은 공무원 대다수는 자기네 문화혁명 얘기도 둔감하다. 그런 그들을 60여 년 전 이웃과의 역사로 감동시키기는 불가능하다.

한국만이 북한을 도울 수 있다. 남한의 주류 세력만이 북한의 배고픔을 해결해준다. 한국에는 3류 종북좌파가 있다. 그 집단은 소수이며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김정일 정권은 한국의 건강한 주류세력에 눈을 돌려야 한다. 종북 좌파에 기대할 게 없다. 천안함, 금강산 관광의 해법도 주류와의 대화로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체제 변동기의 권력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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