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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못 버는 여자는 시집도 못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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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면 방바닥에 네 몸을 본떠서 바닥에 구멍을 파줄게. 그리고 TV를 천장에 붙여줄게. 결혼하면 자기는 매일 바닥에 누워서 TV만 봐”라고 연애 시절 남자 친구는 말했다. 나는 결혼을 두 달 앞두고 남자 친구에게 물었다.
“오빠는 천안이 직장, 나는 서울이라서 출퇴근이 너무 힘들 것 같아. 나 그냥 회사 그만두고, 오빠 따라서 천안에 갈까?”
그러자 남자 친구는 사색이 됐다.
“뭐라고? 정아야, 요즘은 여자도 능력이 있어야 대우받는 시대야. 왜 아까운 실력을 썩히려고 해. 그리고 집에 있으면 심심하기만 할 거야. 그런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 파이팅!”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와 남자 친구는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까지 서울에서 보낸 서울토박이다. 우리는 대학교 4학년 때 취업 스터디에서 만나 서로 첫눈에 반했고, 1년6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하기로 했다.

황금 같은 주말, 혼수 준비에 쓸 여유 없다 #예물 선택, 시어머니보다 내 맘이 중요

남자 친구는 천안으로 발령이 나면서 서울을 떠나게 됐다. 지방에 공장을 둔 대기업이 많아 공대 졸업생은 가족과 떨어져 지방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주말데이트’를 하면서 1년이나 헌신했다. 그런데 꼭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그는 나를 ‘정신적 동반자’이기 이전에 ‘경제적 동반자’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인가.

결국 우리는 신혼집을 용인에 얻기로 했다. 예비남편의 근무지인 천안과 나의 근무지인 서울 강남, 두 곳 모두 통근이 용이해서다. 이로써 앞으로 그와 나는 출퇴근에 한 시간 이상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유리천장’ 못 뚫을 바에야 차라리 결혼
하지만 함께 직장에 다니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우리와 같은 상황에서 주말부부를 선택하는 커플도 꽤 많다. 요즘은 배우자가 지방으로 발령이 나더라도 한쪽이 직업을 포기하고 이동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떨어져 지내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하다.

한국가족상담연구소 송마리 소장은 “주말부부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고 지적했다.이어 송 소장은 “같이 있는 시간이 적을 경우 짧은 시간 동안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한다”면서 “그러다 보면 더욱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어, 오히려 매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내 주변 친구들은 우리의 선택에 대해 “너무 힘들지 않겠어? 그냥 네 회사 근처에 얻어. 너 너무 양보한다”며 핀잔을 줬다.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혼하기 서너 달 전쯤 남자 친구의 행동이 떠오른다. 남자 친구에게 동료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업무량이 늘어나 힘들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투정을 부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다. 도리어 “우리 회사는 더 심하다” 면서 사내 갈등,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이상 등 극단적 사례들만 죽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네가 다니는 직장은 양반”이라고 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둘까봐 두려워 연막을 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사실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다.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한 나는 2년간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는 등 완벽한 스펙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해왔다.
‘100대1’에 육박하는 무시무시한 경쟁률을 뚫고 지난해 대기업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더 능력을 발휘해 승진도 하고 싶고, 나중에는 외국계 회사 컨설턴트로 이직해 커리어를 발전시키고 싶다. 공부도, 운동도, 사회활동도, 리더십도 모두 1등인 여학생을 ‘알파걸’이라고 한다. 나 역시 알파걸이라 자부하면서 입사했다.

하지만 알파걸이라고 모두 성공할 수 있을까? 지난 1년 간의 회사 경험으로 비춰보면 아닌 것 같다. 과장·부장 자리에 오른 선배의 대다수가 남자며, 여성 임원의 수는 남성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었다. 한마디로 ‘유리천장’에 부딪힌다는 뜻이다.
물론 탁월한 업무능력으로 사내에서 인정받는 ‘골드 미스(Gold Miss)’ 선배도 있다. 하지만 결혼과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결혼을 미루다 아직도 혼자인 사람이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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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정장 요구했다 파혼한 사람도 그런 그들의 일상이 부럽지 않았다. 배우자를 만나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회사를 그만두는 상황이 온다면 나를 정신적으로 위로해 주고, 경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든든한 동반자가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남편의 경제력에 기대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의지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른 많은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요즘 남자들은 이런 여자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직업을 꼭 갖도록 강요하는(?) 내 남자 친구만 봐도 그러니 말이다.

실제로 얼마 전 한 남자 동료에게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했더니 대번에 나온 말이 “직업이 뭐야? 어디 다녀?”였다. 그는 “연애가 아닌 결혼 상대로 돈 안 버는 여자는 못 만나겠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한마디로 혼자 벌어서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변이다. 요즘 한창 잘나간다는 변리사인 한 대학 동창의 말은 더 구체적이다.
“경제적 효과만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내 신부 될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다’ ‘무슨 출신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직업이 없으면 세상 물정에 어두워져 부부 동반 모임의 대화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말 이유도 가지가지다. 여자 직업이 혼수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더불어 좋은 신부임을 판단하는 하나의 바로미터로 작용하고 있다.

남자 친구 어머니와 함께 서울 신사동 웨딩타운의 한 한복가게를 찾았다. 내게 이런저런 한복을 입혀보던 시어머니는 세 번째 입은 한복이 맘에 든다면서 “예쁘다. 정말 예쁘죠?”라며 가게 안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모두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한복과는 너무 달랐다. “맘에 드냐”는 예비 시어머니의 물음에 처음에는 “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싫었다. 그래서 계산대로 향하는 시어머니에게 다가가 “어머니, 저 이 한복보다는 처음에 입었던 한복이 맘에 들어요. 어머니는 어떠세요?”라고 내 의사를 전했다. 시어머니의 얼굴이 일순간 붉어졌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결국 내 의견에 따르셨다. 20년의 격세지감이 있는 시어머니와 내 취향이 같을 리 만무하다. 내 사례는 약과다. 요즘 신부들은 시어머니에게 자신이 원하는 예물을 콕 짚어 요구한단다.

먼저 결혼한 내 친구들 말을 들어봐도, 평소 자신들이 갖고 싶었던 명품 브랜드 가방을 예물로 당당히 요구한단다. 친구들이 내게도 꼭 그렇게 하라면서 “지금이 기회야. 아줌마 되면 명품 가방 하나 사기가 쉬운 줄 아니? 받을 수 있을 때 받아”라고 부추겼다. ‘현금 선호파’도 있다. 내가 알아서 살 테니 돈만 달라는 식이다. 또 현금으로 주는 게 편하다는 생각에 아예 시어머니가 먼저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성의껏 챙겨 줘도 며느리가 싫어하면 어쩔까 하는 생각에서란다. 예물과 혼수 문제로 파혼에 이른 커플도 흔하다. 어떤 신부는 예물로 시어머니께 샤넬 정장 한 벌을 요구했다가 결국 이것이 화근이 돼 파혼했다. 다음은 내가 미용실에서 들은 파혼사 한 토막.

“(신랑) 집안이 꽤 사는 편인데 그 정도도 못 사주는 게 말이나 돼요. 난 교육도 받을 만큼 받았고 우리 집도 잘 나간단 말이에요. 날 존중한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죠. 벌써부터 이렇게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같이 살겠어요?” 좀 극단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시댁 식구들에게 ‘좋고 싫은’ 내 의사를 분명히 내보이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직장인에게 주말은 황금 같은 시간이다. 주말까지 가구·가전제품 등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면서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가구단지와 전자제품 전문매장을 다니면서 보다 저렴한 상품을 찾는 그 시간에 차라리 쉬고 싶었다. 친구들 중에 그렇게 했다가 몸살났다는 증언도 내 이런 결정에 한몫을 했다.

내 선택지는 백화점이었다. 잘나가는 ‘신상(최신 제품)’ 을 한눈에 보고, 한 번에 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백화점의 경우 대부분 결혼을 앞둔 신부를 대상으로 ‘웨딩 마일리지’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구매 금액별로 포인트를 정립해 백화점 상품권을 주는 것이다.20만원짜리 상품권을 받고 나니 좀 싸게 샀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미끼상품’에 현혹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어쨋든 나는 세탁기·냉장고·공기청정기 등 가전제품을 단 1시간 만에 모두 살 수 있었다. 그 덕에 주말에는 푹 쉴 수 있었다.

주판알 튕기는 남자 친구에게 화 나기도
결혼 준비를 하면서 화가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결혼에 대해 한참 고민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청첩장도 돌렸는데,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비용 문제가 그랬다. 우리는 각자가 부담할 결혼비용을 철저하게 나눴다. 함께 부담하기로 한 비용은 스튜디오와 예식장 비용뿐이었다.
“우리 호텔에서 결혼식 하자. 난 호텔에서 근사하게 치르고 싶어.”
하지만 남자 친구는 “너무 비싸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
비용을 반반씩 내야 하므로 내 주장만 끝까지 고집할 수 는 없어 서울의 적당한 예식장을 물색하기로 했다. 남자친구가 천안에 있기 때문에 근무시간에 짬을 내 나 혼자 예식장 계약에 나섰다. 1000만원 정도 예식비용이 드는 곳이었고, 나는 계약금 30만원을 지급했다. 그리고 남자 친구에게 문자를 발송했다.
“예식장 계약했어. 앞으로 나는 470만원, 오빠는 500만원 더 내면 돼.”
그러자 너무나도 황당하고, 화가 나는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너는 왜 나보다 30만원이 적냐?”
당장 전화해 화를 냈다. “바쁜 업무시간에 짬을 내서 대신 계약했는데 사람을 믿지 못하고 돈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는 거야?”라고 말한 뒤 ‘이제 끝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것만은 뺐다. 남자 친구의 태도가 정말 싫었다. 아름답기만 해도 모자랄 ‘신성한 결혼식’에 이렇게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슬펐다. 아니 비참한 기분이었다. 결혼 준비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다 보니 갈등도 깊어졌다. 웨딩 촬영 때 입을 드레스와 ‘티아라(왕관:웨딩용 장신구)’를 고르러 하루 종일 남자 친구와 돌아다닌 적이 있다. 하지만 모두 예뻐 보여 선택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일주일 내내 잠자리에 들기 직전 그날 본 드레스와 왕관이 떠올랐다. ‘무엇을 해야 좀 예쁜 신부가 될 수 있을까’ 계속 고민했다. 인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압박했다. 청첩장도 예쁜 것이 많아서 2주일째 고민 중이다. 꼭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모두 맘에 드니 콕 짚어 선택할 수가 없다. 남자 친구에게 무엇이 좋은지 물어볼 때마다 “네가 맘에 드는 것으로 해”라는 무성의한 답변만 돌아 왔다. 이런 비협조적인 말투에 이제 지칠 정도다. 결혼 준비과정은 여자의 일방적인 노동이란 생각이 든다. 신부가 되는 길은 멀고 험하다. 결혼은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한 선택이지만, 준비과정은 꼬인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복잡하고 짜증스럽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단 한 사람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섭섭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결혼을 엎을 만큼 큰일이 아니기에 나는 시집을 간다.

유현정 월간중앙 수습기자 [hjy2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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