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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를 팔아넘긴 국경인과 그를 진압한 정문부 (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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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의 대첩 사실을 기록한 북관대첩비.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이 강탈해 간 뒤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외진 구석에 방치돼 있었다. 오랜 교섭 끝에 2005년 10월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2006년 북한에 전해져 함경북도의 원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왕자와 외척의 신분으로 평소 서울의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다 전쟁을 만나 갑자기 피란길에 올랐으니 그들이 느꼈던 낭패감이 오죽했을까. 더욱이 함경도, 그 가운데서도 회령은 조선에서 가장 궁벽한 오지가 아니던가. 식사나 잠자리가 성에 차지 않았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두 왕자의 외척들은 지역 수령이나 백성들을 닦달했고, 그들의 접대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궁노들을 동원해 매질을 자행했다. 이들이 끼치는 민폐 때문에 결국 민심이 돌아서고 국경인 같은 인물의 선동이 백성들에게 먹혀들었다.

 반역자로 돌아선 것은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호수(豪首)라 불리던 지역의 유력자와 토병(土兵)은 물론 지방 수령도 포함돼 있었다. 일부 수령 중에는 일본군에게 항복을 결심하면서 작성한 맹세문에서 “나를 위무해 주면 임금이며 나를 학대하면 원수이니,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라며 노골적으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아첨하는 자도 나타났다.

 함경도 지역의 이 같은 분위기를 바꾸고 국경인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 정문부(1565~1624)였다. 애초 함경도의 수령이나 장수들 대부분이 일본군이나 지역의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었던 상황에서 북평사(北評事) 정문부 또한 붙잡혀 빠져나오기 힘든 상태였다. 그런데 『선조실록』에 따르면 ‘정문부는 평소 무장으로 있으면서 형장(刑杖)을 사용하지 않고 지역의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제자들의 비호를 받아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민심을 얻었던 것이다. 정문부는 1592년 9월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3000여 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정문부는 일본군과 싸우기에 앞서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鞠世弼)을 비롯한 13명의 반역자를 처단했다. 우두머리 급은 제거했지만, 일반 반민(叛民)들이 저질렀던 죄는 불문에 부쳐 민심을 얻었다.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국세필 등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회령 유생 신세준(申世俊) 등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을 제거했다. 정문부는 의병을 이끌고 명천(明川)을 수복한 뒤 길주(吉州)에 웅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포위했다. 정문부의 의병이 땔감 공급로 등을 차단하며 압박을 가하자 가토는 마침내 길주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유명한 북관대첩(北關大捷)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민심을 자극하면 백성들은 반역자가 되기도 하지만 민심을 다독이면 의병이 된다. 국경인과 정문부의 행적을 돌아보면서 민심의 무서움을 새삼 절감한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