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우리동네 ⑫ 천안시 직산읍下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직산을 두 번째 소개한다. 그만큼 다른 동네에 비해 알려줄 것이 많다. 다양한 역사를 머금은 흔적이 아직 곳곳에 남아있다. 지역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한 위례문화원장 윤종일씨를 통해 직산의 역사를 짚어봤다.

글=김정규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전설에서는 남산 부엉바위가 날마다 곡식 천석을 허비하는 상이라고 했다. 직산 고을이 이로 인해 가난해진다 해 험상한 기운을 제거하기 위해 큰 못을 팠다. 바위 그림자를 거꾸로 비춰 기능을 상실케 했다는 것이다. 이곳이 도영지다.


직산의 연혁

삼한시대 마한(목지국:월지국)으로 일부 역사가에 의해 비정되고, 백제 온조왕(BC18~5,13년:하남위례성), 고구려 장수왕(475년경:사산현), 신라 진흥왕(555년경:백성군)의 영현으로 사산,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인 직산(稷山)으로 고쳤다. 태조 왕건의 천안도독부 설치(930년)로 지금의 부성동, 신안동 일부를 천안에 붙였다. 현종9년(1018년)에 천안부에 소속, 조선 연산군(1505년)때 경기도로 이속, 중종 때 다시 충청도 청주진관 소속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뒤에 평택을 병합(1594년) 6년 뒤 다시 나눴고, 1914년 일제에 의해 직산읍, 성환읍, 성거읍, 입장면, 안성시(미양면 일부), 평택시(팽성, 계양포, 망해산 봉수대), 안중읍(황산리, 직산말 등), 포승읍(현재 평택항 만호리, 신영리, 월경지 외야곶)으로 분할됐다. 현재의 직산읍에 이르고 있다.

백제초도 직산 하남위례성(BC18~5, 13년)

윤종일 위례문화원장.

백제의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 졸본 부여로부터 10명의 신하들과 내려와 한산 부아악(현재용인 부아산, 일부는 삼각산에 비정함)에 올라 북대한수-북쪽으로 한수를 띠고, 동거고악(동쪽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고), 남망옥택(남쪽으로 넓은 옥택을 바라보고), 서조대해(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혔으니 가히 얻기 어려운 형세)라 해서 마한의 진왕으로부터 동북100리 땅을 봉토 받아, 비류는 미추홀(아산시 인주면 밀두리, 일부는 인천시 문학산), 온조는 직산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 하고, 비류가 죽자 국호를 백제라 고친다.

 이후 백제는 직산 위례성~한성(하남시 고골, 풍납토성 부근)~북한성(남평양성)~웅진 공주~사비 부여로 천도를 하며 BC18~660년 678년의 22담로국을 거느린 해양강국 대백제를 이루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다.

 직산 하남위례성은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년)에 미상지명으로, 일연의 삼국유사(1285년)에는 지금의 직산이라고 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당대 조선 최고의 석학인 서거정의 제원루기(백제의 근원이 되는 누각, 1477년경),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규장각의 조선후기 고지도 대부분에 하남위례성이 직산이라고 분명하게 표시돼 있다.

 지금 ‘직산 위례성’이라 전하는 천안 입장 양대리~북면 대평리의 부소모이고개(일명 부수문이, 부소령) 능선 위 부소산 위례성에서 백제초도 위례성을 규명하기 위해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만한 성과는 백제초기의 타날문 토기와 삼족토기, 우각파수호, 기와편이 시대를 달리하며 무수히 확인되고 있다.

직산 위례성, 고고학적 연구 탄력

최근 한성백제기 백제의 북방진출을 알 수 있는 2~3세기경 대규모 집단 가옥터가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에서 발견됨으로써 초기 한성백제의 세력이 춘천~화천~임진강~예성강 유역의 유물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됨으로써 직산 위례성의 고고학적 연구가 탄력을 받고 있다.

 천안 청당동 유적에서도 용봉문 환두대도와 마구류가 출토됨으로써 직산 지역이 마한시대와 초기백제 온조왕의 위례성시대~한성 백제시대의 중요한 거점임이 고고학적 사료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직산의 성산(일명 사산성)에서도 퇴뫼식과 포곡식의 판축식, 토석혼합식 성벽이 확인됐고, 일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신석기시대부터 직산이 고대 강력한 세력이 웅거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온조대왕의 직산 위례성은 강력한 철기문명의 선진집단의 정착이고, 철과 금을 바탕으로 마한을 멸하고, 동북으로 낙랑과 말갈족과 대결하며 강력한 고대왕국 22담로국 대백제의 시작이 이곳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마한왕이 온조왕 일행에게 봉토한 직산 위례성 즉 천안-아산-평택-안성의 100리 강역은 마한의 옛터다. 또한 대한민국 삼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해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이고, 물류의 신속한 이동은 국부를 이루는 근간이다.

 2010년 세계대백제전의 혼불도 지난 9월16일 직산 위례성에서 채화했다. 비록 13년간의 짧은 백제의 첫 도읍지 직산이었지만 우리는 그 시작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역의 문화재
호서지역과 경기도의 경계, 직산현 관아의 정문 ‘호서계수아문

호서계수아문

직산현 관아의 정문이다. 호서지역과 경기도지역의 경계에 관아가 있으며, 호서지방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지방문화제 51호로 지정됐다. 직산읍 군서리에 있다.

 아문은 중층 누문 형식으로 초익공계 팔작집이다. 아래층에는 간마다 판문을 달아 드나들게 했고, 위층은 마루를 깔아 누로 사용하게 했다. 아문에 들어서면 한단 높은 터에 솟을 대문 행랑채가 있고 들어서면 동헌이다.

 동헌은 정면 7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집이다. 동헌뒤에는 현감의 살림채인 내동헌이 있는데 이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으로 민도리집 양식의 팔작집이다. 91년에 삼은리에 있던 객사를 관아앞에 있던 창고를 헐어내고 이전했다.

직산향교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09호로 지정됐다. 84년 5월17일 대성전이 문화재자료 제248호 지정되었다가 기념물로 변경됐다.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전하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 하고, 97년 서재를 복원했다. 면적은 3458㎡.

 대성전·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동서협문·홍살문·수복사로 구성되며, 내삼문은 평열문, 외삼문은 솟을대문이고, 동서로 협칸이 1칸씩 있다. 홍살문 앞에는 ‘大小人育皆下馬戊辰開四月一日’이라고 적힌 하마비가 있다.

 5성위(공자·안영·증자·자사·맹자)와 중국 송의 2현, 국내인 18현(설총·최치원·안유·정몽주·김굉필·정영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이 배향됐고, 김안국의 친필 액자와 경서류, 선생안(先生案)·선안(仙案)·절목(節目)·노비안·전답 문기 등 많은 고문서가 소장돼 있다.

직산 사산성

1997년 8월 5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됐다. 전체둘레 1450m, 산성 둘레 1030m, 높이 1.2m, 너비 3.5m, 면적 3300㎡이다. 부분적으로 석축의 흔적도 있지만 대부분 토성으로, 높이 176m의 성산 정상에 축조된, 750m의 산정식 산성과 이 산성의 양쪽 끝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감싼 1030m의 포곡식 산성으로 된 이중 복합식 산성이다.

 학계에서는 마한의 목지국(目支國)으로 추정한다. 직산의 진산(鎭山)을 사산이라고 하는데, 이는 삼국시대 직산의 옛이름인 사산에서 유래한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 기와 등이며, 토기 중 보시기류나 항아리류는 5~5세기 전반의 백제와 고구려와 관련되며, 6세기 후반 신라 계통의 유물 단각고배(短脚高杯)도 있다. 기와의 무늬는 선조(線條)무늬·격자무늬·어골무늬·복합무늬 등 다양하다.

민익현 가옥

1987년 12월 30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1820년경 규장각(奎章閣)의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었던 민승세(閔承世)가 이곳 직산(稷山)으로 낙향하여 지은 주택이다. 대지 600평 위에 ㄱ자형으로 구성된 집이다.

 안채 1동은 26평이며 팔작지붕으로 된 목조 기와집이다. 사랑채와 행랑채가 전체적으로 조금 높으나 사랑채보다는 안채가 약간 더 높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한집에서 6대가 계속하여 살고 있다.

현재 소유자인 민익현(閔益鉉)은 민승세의 5대 손이다.

1. 직산 조씨 조성의 유적.
2. 충남도 기념물 109호로 지정된 직산향교.
3. 임진왜란 후 직산 현감으로 부임한 이신의 선생 시비.


지역의 인물
직산 조씨의 시조 조성 … 백제창업공신

조성(趙成)

‘직산조씨갑자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조성은 한(漢)나라 성제(成帝:11대 황제, 재위기간 기원전 32-7) 때 주몽(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도와 위례성에서 백제를 건국하고, 한산으로 천도해 마한을 명망시킨 후 백제창업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훈공을 세워 경양군에 봉해졌다. 뒤에 다시 예성부원군으로 개봉됐다가 하남백에 이봉(移封)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준연과 손자 입충이 함께 금오대장군을 역임한 것으로 전한다.

황세득(黃世得, 1537~1598) 조선 중기 무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했다. 선전관 등 여러 벼슬을 거쳐 광량첨사, 장흥부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사량첨사로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벽파정, 고금도 싸움에 출전해 공을 세웠다. 1598년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독, 진린과 함께 예교에서 왜적을 협공할 때 선봉으로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호조참판에 추증됐다. 묘는 직산읍 마정리 용와산에 있다.

황박(黃珀, ?~1637) 조선 중기 무신

본관 성주. 충남 직산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고, 1621년 명나라 사신이 왔다가 돌아갈 때 후금이 선양과 랴오양을 함락해 육로가 막히자 자원해 해로(海路)로 명나라 등주까지 전송하고 돌아왔다. 1634년 의주부윤을 지낸 뒤 중추부동지사에 이르러 고령으로 퇴관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관찰사 정세규 휘하에 종군, 용인전투에서 적군에 포위돼 분전하다 얼굴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숙종 때 그 부자의 정문(旌門)이 고향에 세워지고 공조판서에 추증됐다.

마을 지명 유래
용이 누워 있는 모습의 용와산

부송리

한샘들 가살미 아래쪽에 있는 들로써 큰 샘이 있었다고 한다. 샘이 크고 물이 한없이 나온다고 했는데 부송 농공단지로 인하여 적게 나온다.

조양들   굿개 건너편에 있는 들.

날근터구레   소터 골 동북쪽 너머에 있는 들.

뒷갓골   부대앞에 있는 들.

소텃골  솔터 골 송기(松基), 부송리에서 가장 큰 마을.

가살미  뒷가골 아래쪽에 있는 들.

부대리  소텃 골에서 부대로 넘어가는 고개.

대문안밭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 때 대문안에 있던 밭이라고 한다.

모시리

옥녀봉(玉女峯)  길마제 서쪽 봉우리. 단정하고 고아 옥녀 같다고 한다.

신선골  신선골(神仙). 모사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길마제   모사 뒤에 있는 산. 높이 99m길마처럼 생겼다고 한다.

감나무골  시목동, 시목리라고도하며 모사옆에 있는 마을. 감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모사(毛沙)   모시리라고도 하며 모시리에서 가장 큰 마을.

짐잿들   직산역 부근의 들.

한샘   모시리 중간에 샘이 있는데 항상 물이 넘친다.

자은가리

지목골   자은가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정해논   논 6마지기가 흉·풍년없는 옥답이라 그 농사 하기를 원했으며 부러워하였다.

마기샘   심이 깊어 명주실 한꾸리가 다 들어간다고 했는데 현재는 없어졌다.

참나무 백이   부락이 있었는데 지금도 기와조각과 그릇 깨진 것이 나오며 이 부락민이 마귀샘의 물을 먹고 살았다고 전해 온다.

양전고개   잔가리에서 양당으로 넘어가는 고개.

양당리

덕지제(德池堤)   양전 방죽 양전 저수지 1947년 8월 준공되었다.

당골   양전 북쪽에 있는 마을. 뒷 산에 산제당이 있었다.

정지넘어  양전 뒤에 있는 골짜기.

말무덤   옛날 전쟁때 말이 많이 죽어 이곳에 묻었다고 전하여 온다.

통상골   통장사가 통과 상을 만들며 살았다고 한다.

우물제   우물제를 지냈는데 새마을사업으로 없어졌다.

장터벌   마정리 구역과 경계인데 옛날에 장이 섰었다고 전하여 온다.

상덕리

관방다리  중리 철교 옆에 있는 다리. 금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구호방축(九號防築)   중리 서쪽에 있는 방죽. 사금을 캐는데 차례로 9호가 되었다.

덕령골(德命) 상덕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한샘골   한섯골이라고도 하며 상남리 앞에 있는 골짜기 큰 샘이 있다.

진너머(집너머)   상남리 너머에 있는 골짜기.

상남리(上南里)   덕령골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밤나무정이   중리 남쪽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이 있다고 한다.

덕지골   닭집거리라고도 하는데 덕령골 북쪽에 있는 마을. 닭집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석곡리

돌실   뒷동산에 돌이 많아서 돌실이라 하였다.

빨래터(덤바위) 전에는 이곳에 물이 있어 온 동네 사람들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였다.

붕어바위   붕어 같이 생긴 돌이 바위에 붙어 있어서 붕어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신제   이 부락에서 산신제를 지냈는데 현재는 한 집 만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절골   10년 전 까지만 해도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간이 상수도원이 이곳에 있다.

돌다리   돌다리가 있었는데 현재는 없어졌다.

신갈리

갈미(葛尾)   갈산이라고도 하며 신갈리에서 가장 큰 마을. 갈미봉(성왕산)이 있으며 산 봉우리가 매우 수려하다.

말고개  이 고개로 옛날에 말이 많이 넘어다녔다고 한다.

웃갈미고개  갈미에서 천안, 아산으로 넘어 다니는 고개.

바리미고개   성환과 직산으로 가는 고개.


마정리

냉미구레(냉밑)   미륵산 앞에 있는 들. 찬물이 많이 난다고 한다.

구수샘   독정이 위에 있는 우물. 구유(구슈)처럼 생겼는데 물이 썩 많이 난다고 한다.

용와산(龍臥山)   산이 높고 수려하며 산 모양이 용이 누어있는 형상이라고 하며 산중에는 병자호란때 의병장으로 순절한 장열공(壯烈公), 황박(黃珀)의 묘와 임진왜란 공신 충장공(忠壯公), 황세득(黃世得)의 묘가 있다.

용굴(龍窟)  용와산 중턱에 있는 굴로써 옛날에 용이 나왔다고 한다.

쇳대봉   솟대봉. 소태봉이라고도 하는데 미륵산 남쪽에 있는 산. 삼한 때 천제를 지내던 곳이라고도 전한다.

미륵산리   미력산(미륵산). 신마산 남쪽에 있는 마을.

대마산(큰마산)  마산의 제일 큰 마을.

독정리(獨井里)  덕정(德井). 마산 남쪽에 있는 마을.

말바위(馬岩)  용굴아래 논 옆에 있는 바위. 말등처럼 생겼다고 한다.

정문거리  선조 때 황세득(黃世得), 인조 때 황박(黃珀)의 부자 정문이 미륵산에 있다.

날근터   기와 조각이 많이 나오는 옛 마을터.

서낭당이 고개   아산군으로 넘어가는 고개.

귀골 평평하고 넓으며 사람 산 흔적이 있고 기와장이 나오며 옛날 귀한 분 즉 통치자가 이곳에서 살았던 곳이라 한다.

오씨네효자정문  미륵당이 앞에 있는 효자 정문.

광대동  그릇점이 있었으며 몇호가 살고 있다.

막은고개  대마산 옆에 있는데 도둑이 오는 형의 고개라고 하여 고개를 메우고 막아버려 고개를 없애 버렸다.

가마골  철을 생산하는 쇠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내새  동네가 있었다고 하며 구들과 기와 그릇조각이 나오며 도둑 때문에 못살고 이곳으로 이사해와 산다고 전하여 온다. 철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대장간  철의 일을 하던 대장간이 큰 마산 앞에 있었다.

옻나무골  옻나무 작은 것이 많이 있다.

앞날산  큰 마산 앞날이 되는데 구절초가 많아 여인들이 많이 채취해 간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