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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out 맛] 김수진의 '검은콩 찹쌀 수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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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남매의 맏며느리로 시집왔던 28년 전. 친정에선 가끔 설거지나 하는 정도였던 나에게 시집살이는 말 그대로 '식모살이'였다. 오전 4시에 일어나 시동생.시누이.남편.시어머니의 차례로 아침상을 네번씩 차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모든 음식을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하셨던 시어머니 덕분에 부엌에서 발을 뺄 틈이 없었고 부산내기인 나와 서울 출신인 어머니의 입맛이 달라 같은 음식을 두 번씩 만들기도 일쑤. 김장 담그는 날이면 배추 한 접을 아파트 4층까지 옮기느라 몸살이 나기도 했다. 담근 지 얼마 되지 않은 간장 맛이 변했다며 "며느리가 잘 못 들어오면 장맛이 변한다더라"고 타박을 하시는 통에 부엌문에 기대어 하루종일 울었던 기억도 난다.

그런 시어머니가 계절이 바뀔 때나 식구들 중 누군가 기력이 없어 보일 때 별미로 해주시던 음식이 검은콩 찹쌀 수제비다. 찹쌀.멥쌀 가루를 반죽해 새알심을 빚어 미역과 함께 육수에 넣고 끓인 뒤 들깨가루를 곁들여 상을 차릴 무렵이면 고소한 냄새에 침을 삼키던 시동생.시누이가 부엌문을 열고 재촉하곤 했다. 소화도 잘되고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이라 한 그릇 든든히 먹고 나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정도로 개운했다.

한번은 시원한 맛을 좀 살려볼까 해서 미역을 넣고 끓였다가 "시키지도 않은 짓은 왜 했느냐"고 야단을 맞았다. 당신의 음식을 내 스타일로 만드는 것이 싫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미역 덕분에 국물 맛이 살아나자 슬그머니 "그것도 괜찮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그때 시어머니에게 배운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밑거름이었다. 뒤늦게 요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나섰을 때 적극 후원해 주셨던 것도 다름 아닌 시어머니였다. "애들하고 집안일은 내가 돌볼 테니 너는 나가서 하고 싶은 일 해라"는 격려가 눈물나게 고마웠다.

10년 전부터는 파킨슨병으로 왼쪽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셔서 더 이상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됐다. "이제는 네가 다 알아서 해야지"라며 웃는 모습이 안쓰럽고 죄송스러울 때면, "어머니, 수제비 드실래요?"라며 찹쌀 가루를 찾곤 한다. 새알심을 빚으며 자식들의 안녕을 기원하시던 예전의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는 내가 어머니의 건강을 빌며 수제비를 만든다.

정리=신은진 기자 <nadi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김수진씨는=푸드 스타일리스트 전문 교육기관인 푸드앤컬처코리아(Food&Culture Korea) 원장. 서양식 테이블 데코레이션을 우리 고유의 한식상에 응용해 선보이고 있다. 현재 오산대학교 등 여러 교육기관에서 식문화 관련 강의를 진행 중이며 각종 방송 및 잡지에서 푸드 스타일링 지도와 연출을 맡고 있다.

*** 검은콩 찹쌀 수제비 따라 만들기

▶재료(2인분 기준)=찹쌀가루 300g, 멥쌀가루 100g, 검은콩 1/2 컵, 소금 한 작은술, 미역 20g, 다진 소고기 200g, 호박.당근 각 50g, 대파.마늘 각 100g, 참기름 1 작은술, 국간장 1 작은술, 들깨가루 2 큰술

▶만들기

① 콩은 6시간 정도 불린 뒤 삶아 덩어리가 약간 씹힐 정도로 믹서에 간다. 미역은 불린 뒤 4cm 길이로 썰어둔다.

② 찹쌀.멥쌀가루에 소금을 넣어 섞은 뒤 갈아둔 콩을 넣어 익반죽한다. 먹기 좋은 크기로 새알심을 만든다.

③ 다진 소고기는 참기름.국간장을 넣어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인다. 대파와 마늘을 넣고 국간장으로 간을 해 육수를 만든다.

④ 육수에 만들어 놓은 새알심을 넣어 끓인다. 새알심이 다 익어 동동 떠오르면 불린 미역을 넣고 한 번 더 끓인다.

⑤ 들깨가루, 채 썬 호박과 당근 등을 올려 내간다.

▶손맛 포인트

하나. 찹쌀.멥쌀 가루는 고운 체에 한 번 내려주어야 반죽이 부드럽다.

둘. 반죽은 반드시 끓는 물을 끼얹어 가며 익반죽해야 찹쌀가루의 쓴맛을 없앨 수 있다.

셋. 새알심을 넣고 끓일 때 국자로 휘저으면 모양이 망가지기 쉬우니 살짝 저어준다.

넷. 들깨는 껍질을 벗겨 갈아야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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