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양떼를 치는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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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페소아(1887~1935), '양떼를 치는 사람'중 '시 제1편'전문

나는 한번도 양떼를 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리 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으리.

내 영혼은 목동과도 같으니,

내 영혼은 바람과 햇빛을 알고

그리고 사계절의 손에 인도되어

갈 데를 가고 볼 것을 본다.

인적 없는 자연의 가득한 평화가

내 곁에 와 앉는다.

그러나 나는 해질녘처럼 서러우니,

우리네 상상에 따르면

소쇄(瀟灑)한 대기가 온 벌판을 적시고

마치 한 마리 나비가 창문으로 날아 들어오듯

밤이 들어오는 게 느껴질 때.

하지만 나의 설움은 고즈넉함이라.

그것은 자연스럽고 알맞기 때문

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것은 영혼 속에 맞춤히 깃들기 때문

그 모르게 두 손은 꽃을 따 모으고 있기 때문.

길의 굽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짤랑대는 방울소리처럼

내 생각들은 자족한다.

나는 그것들의 자족함을 알고 있기가 힘들어진다.

왜냐면 만일 내가 그것을 모른다면

그것들은 자족하고 설운 대신에

쾌할히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건, 빗속을 거니는 것만큼이나 거북살스럽다,

바람은 거세지고 빗방울은 굵어질 때.

나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된다는 건 내게 야망이 아니다.

그것은 홀로 살아가는 내 방식이다.

그리고 이따금 내가 욕망한다면, 가령

순수한 상상을, 부드러운 어린 양이 되기를

(또는 양떼 전체가 되기를,

경사면 위에 가득 흩어져

동시에 여러 행복한 것들이 되기 위해) 욕망한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내가 해질녘의 글쓰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구름 한 점이 빛살 위로 손을 내밀고

침묵 하나가 숲을 가로질러 달아날 때의 글쓰기를.

내가 앉아서 시를 쓸 때나

혹은 길들과 오솔길을 산보하면서

머리 속의 종이 위에 시를 적을 때

나는 양치기의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본다, 나의 실루엣이

언덕 꼭대기에서

나의 양떼를 응시하며 나의 시상(詩想)들을 보거나

나의 시상들을 응시하며 나의 양떼를 보는 것을,

그리고 막연히 미소 짓는 것을, 마치 제가 무얼 말하는 지

모르면서 다 안다는 듯 표정하려는 이처럼.

나는 나를 읽을 모든 이들에게

내 커다란 모자를 벗어 인사한다,

언덕 능선 위로 역마차가 모습을 드러내는 때에 맞추어

내 집 문간 위로 내가 나오는 걸 그들이 볼 때.

나는 인사하며 글들에게 햇볕이 비추어주기를 빈다.

필요하다면 비가 내리기를.

그리고 그들의 집, 열린 창의 구석에

특별히 좋아하는 의자 하나를 가지고 있어서

앉은 채로 내 시를 읽을 수 있기를.

또한 내 시를 읽다가 그들이

내가 자연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이를테면, 오래된 나무와도 같아서

놀기에 지친 아이들이, 폴록!, 그 그늘 아래 뛰어들어

빗살무늬 앞치마의 소매로

그들의 불타는 이마의 땀을 훔칠 수 있기를.



지난 문예지들을 넘겨보다가 '언어의 국경 너머에서 만난 이 한편의 시'란에 소개된 이 시가 눈에 확 들어왔다. 포르투칼어 시의 프랑스어 번역을 정과리 교수가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꿰맨 자리가 잘 보이지 않는 天衣(천의) 같았다. 어떤가, 언어의 국경 너머로 무한의 越境(월경)을 감행하고 싶지 않는가.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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