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는 학생들의 졸업여행에 동행했었다. 교수는 방문 전에 한국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집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한번쯤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저 호기심이었다. 그는 따로 시간을 내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가해자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그는 위안부의 고통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눔의 집에는 한때 소녀였던 이들이 할머니가 된 채 아직 살아 있었다.
교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3, 4학년을 대상으로 개설된 ‘경제 세미나’의 주제를 위안부로 바꿨다. 첫해 세미나의 이름은 ‘할머니로부터의 숙제(ハルモニからの宿題)’. ‘ハルモニ’는 우리말 ‘할머니’를 발음 그대로 일본어로 옮긴 것이다. 교수도 몰랐고, 학생도 모르는 주제였다. 주변의 거부감과 비난은 또 어떡할 것인가.
지난 5일 ‘나눔의 집’을 방문한 한 일본여성이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최승식 기자]
그해 9월 교수는 마지막 수업을 ‘한국 현지 세미나’로 결정했다. 모형 위안소 안에서 어떤 학생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진실은 무겁고 아팠다. 사과를 해야 할지, 인사를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학생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할머니들이었다. “젊은 당신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지 않아요”라며 어린 학생의 손을 잡았다. 교수와 학생들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도 참석했다. “우리들도 사죄한다. 일본 정부도 사죄하라”고 외쳤다. “이 진실 앞에서 도망쳐선 안 된다”고 했다.
6년이 흘렀다. 교수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세미나를 진행했다. 2005년엔 피해자 중 한 분인 이옥선 할머니를 초청해 증언 집회를 열었다. 올해 세미나에 참가한 세코 지에미(20·일본어과 3)는 “교과서에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인근 학교를 찾아가 알릴 계획”이라고 했다. 교수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매해 세미나를 정리한 책도 발간했다. 교수와 학생은 자비를 털었다. 2008, 2009년엔 경제위기로 책을 내지 못했다. 교수님의 행동이 조국에 해를 끼치는 건 아닙니까.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조국 일본을 좋은 나라로 만들고 싶어요. 좋은 사회는 틀린 것, 잘못된 것을 인정할 줄 압니다. 그뿐입니다.”
매년 3000명의 일본인이 진실을 찾기 위해 ‘나눔의 집’을 찾는다. 그곳에는 2명의 일본인이 상주하며 봉사하고 있다. 한 달 정도 봉사하는 일본인도 여럿이다. 우리의 할머니는 국제사회에 위안부 이슈를 던진 최초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들의 용기에 존경을 담아 일본인들은 피해자들에게 ‘Halmuny’라고 부르고 있다.
고베=김효은 기자, 강인식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Halmuny가 아니라 ‘Halmeoni’ 표기가 맞다는 독자의 지적이 있었다. 2000년 바뀐 외국어 표기에 따르면 후자가 맞다. 본지는 관습적으로 쓰여진 이 말이 처음엔 ‘Halmuny’로 쓰였음에 주목했다. 정신대대책협의회가 국제문서를 만들 때도 처음엔 ‘Halmuny’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