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대기업 하청업체를 운영한 하윤성(가명·53·뒷모습) 사장이 본지 남형석 기자와 만나 깊숙한 건설업계의 부조리를 털어놨다. 하씨는 대기업 A사의 이사 명함을 들고 다니면서 공사수주 및 각종 인허가와 관련한 로비스트로 일해 왔다고 고백했다. [박지혜 인턴기자]
‘0.07점’.
본지가 단독 입수한 심의채점표. 얼마 전 준공된 한 댐 공사의 입찰 당시 설계 심사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A사와 B사의 점수 차이가 100점 만점에 0.07점밖에 나지 않는다. 1750억원 규모의 공사가 소수점으로 결정된 셈이다.
공사비 수천억원에 이르는 상당수의 공사가 심사 점수 소수점 차이로 업체를 선정하는 탓에 업체 간 생사를 건 로비가 불가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설계와 시공을 한 업체에 맡기는 턴키 방식에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도 많다. 우선 설계 심의에 드는 비용이 수십억원대에 이르다 보니 심의에 참가할 수 있는 업체는 대형건설사 몇 개뿐이다. 턴키 제도 에서는 설계 비용과 수천 명의 심의위원 후보를 관리할 자금이 부족한 중견건설업체들은 공사를 따낼 가능성이 거의 ‘제로(0)’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로비가 과열될 수밖에 없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설계에 들어간 수십억원의 비용을 날리지 않기 위해 대형건설사들은 설계 심의를 맡는 교수·연구원들에게 치열한 로비를 한다. 이 과정에서 직접 나서기가 부담스럽자 하청업체를 앞장세운다는 것이다. 김헌동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국책사업감시단장은 “로비로 설계 심사를 통과한 대기업들은 업체끼리 가격 담합을 한다”며 “한마디로 설계 부문의 로비와 가격 부문의 업체 간 담합이 차례로 이뤄지는 ‘이중 비리구조’인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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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심의가 반나절 만에 이뤄지는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설계 심의는 수천 명의 심의위원 후보 중 몇 명에게 심의 당일 새벽에 통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비리를 사전 차단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지만 단 몇 시간 만에 수백억~수천억원짜리 공사의 주인이 결정된다는 얘기다. 이복남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심의위원들도 짧은 시간 내 설계 심의를 다 마쳐야 하니 꼼꼼한 점검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대신 평소에 자신을 잘 접대한 건설사들이 생각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문제점을 알고 있는 정부도 궁여지책을 쓰고 있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입찰 비리를 막기 위해 민간 심사위원 3000여 명의 재산을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본지 8월 12일자 1면). 법률이 개정되면 교수·연구원 등 민간 위원들은 임기 2년 동안 재정부에 재산 등록을 해야 한다.
탐사1·2팀 김시래·진세근·이승녕·강주안·고성표·권근영·남형석 기자, 이재동 인턴기자(고려대 4학년), 이정화 정보검색사
사진=박지혜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