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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10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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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아마 창고로 썼나 봐. 그전에 이층이 다방 하던 자리거든. 너 여기 와서 작업해라.

무가 그렇게 제안을 했다. 먼지가 제법 쌓였고 잡동사니가 많았지만 한쪽으로 치워 놓으면 제법 방 하나만 한 공간은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응낙의 뜻으로 말했다.

- 괜찮은데 한여름엔 찌겠는걸.

- 뭘 그래, 빨가벗구 하면 되지. 느이야 만년필에 종이만 몇 장 있으면 되잖아. 내가 앉은뱅이 책상두 만들어 줄게.

그 집은 이미 팔려서 신축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의 말로는 주인의 아들이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어서 집을 허물 때까지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언제 허물거냐니까 아마 착공하려면 내년에나 가능할 거라고 말했다. 나는 일단 동굴에 있는 짐들을 꾸려 가지고 집에 들어갔다가 나올 작정이었다. 그날 셋이서 밤 늦게까지 소주를 마셨다. 무는 나처럼 홀어머니의 맏아들이었다. 그리고 부모들이 월남해 내려왔고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뜬 것까지 똑같았다. 그의 집도 어머니가 늙어감에 따라 우물이 차츰 마르듯이 가진 것들을 까먹고 있을 터였다. 그맘때에는 같은 또래끼리 말 몇 마디만 해보면 서로를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 글쎄 요즈음 화단은 일본 '미술수첩' 잡지가 장악하구 있다니까. 모씨 전람회 갔었는데, 내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글쎄 그 일본 잡지 화보에 나온 거였어. 전시장 그림 배치까지 그대로 베꼈더라.

내가 그를 건드려 보았다.

- 추상은 또 뭐야, 구상은 뭐구?

무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 글쎄 말이야. 일본 놈들 흉내 내지 않았을까. 국전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든지. 학교에서 교실두 아예 그렇게 갈라놨어. 성진이 얘처럼 드로잉 실력두 안 되구, 찬찬히 그리고 앉았기두 지루해서 그래. 그냥 색깔이 좋지. 자연과 일치하는 그런 색 없나.

나는 성진이와 함께 수유리로 가서 짐을 싸 가지고 내려왔다. 택이는 역시 어디로 여행이라도 떠나버렸는지 동굴은 아직도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그의 책 한권을 집어서 메모를 남겼다. 안쪽 페이지 공백에 성진이가 우리를 그린 그림도 있었다. 나는 사과궤짝 책상에 앉아 뭔가 읽고 있었으며 택이는 동굴 앞마당에 돌을 걸쳐놓은 부뚜막에서 취사 중이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책과 내 메모와 함께 남아서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돌아다녔다. 책은 별거는 아니었지만 영국 조각가 헨리 무어의 작품집이었다. 그가 2차대전 중에 런던 지하철 플랫폼에 대피 중인 시민들의 여러 자세들을 크로키한 것들이며 당시의 사진이 비교되어 실려 있었고 이것이 실제 조각으로는 어떻게 반영되었나 하는 것이 순서대로 실렸다. 현실 속 사람들의 자세며 모양이 생략되기도 하고 수집되기도 하면서 크로키가 변해가는 게 꽤 인상적이었다. 택이는 아마도 사진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나도 현실과 창작이 서로 긴장하고 부딪치면서 변하여 전혀 새로운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지. 감옥에서 역시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표현의 변화들을 보면서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무어의 그 화보집을 찾아 보랬더니 없다고 했다. 웬 영국, 글쟁이는 많아도 음악가 화가는 유명한 이가 별로 없던데.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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