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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 ‘나 거기에 그들처럼’ 박노해, 인류 대안의 삶을 꿈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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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j ‘박노해→박기평→박 가스파르’

1980년대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유명했던 박노해씨. 그의 ‘생각의 여정’을 이번 주 의 j 프런트 페이지로 소개합니다. 오후 9시 반 본사 스튜디오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세 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인근 생맥줏집으로 옮겨 새벽 2시까지 j 제작팀 기자들과 그의 인생살이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 그의 이름은 셋입니다. 본명 박기평(基平)은 ‘평화의 기틀을 잡으라’는 뜻으로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이랍니다. 시집 ‘노동의 새벽’의 필명 박노해(勞解)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의 줄임말이죠. 형과 여동생이 신부·수녀에다 자신도 신부가 되기를 원했던 그의 가톨릭 세례명은 ‘가스파르(Gaspar)’입니다. 가스파르는 별을 따라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했던 동방박사 3인 중 한 명이지요. 먼 거리를 걸어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지켜보는 그런 의미랍니다.

# 그의 삶과 사고의 궤적은 박노해로 출발해 박기평을 지나 박 가스파르로 향해 가고 있는 듯했습니다. 6일 인터뷰에서 그는 “실패한 사회주의 혁명의 오류를 정직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후 이라크 반전 평화운동을 거쳐, 그는 이제 지구촌 곳곳 오지의 소외된 사람을 찾아가 더불어 도와주고, 그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가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인터뷰 말미 그의 인생 결론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였습니다. 파란만장한 53년 삶을 살아온 한 혁명가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삶의 해법으로 확신하게 된 이유를 독자들과 공유해 봅니다.

최훈 중앙일보 j 에디터



사진 전시회 ‘나 거기에 그들처럼’ 개막 날, 시인 박노해를 만났다. 12년여 동안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의 분쟁지역과 빈민촌을 다니며 찍은 사진 13만여 장 중 120장을 선별해 선보이는 전시회였다. 전시회(10월 25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오프닝 행사를 마친 뒤 오후 9시 본사 스튜디오를 찾은 전직 혁명가이자 현직 평화활동가는 사진을 ‘빛으로 쓴 시’라고 했다. 그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이어진 인터뷰 내내 조금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가 추구하는 21세기 인류의 대안적 삶과 근원적 혁명의 길을 설명했다.

글=이훈범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고향·전통·아날로그·도리·원칙을 생각하는 보수다”

혁명 오류 성찰하는 과거의 혁명가

과거 그는 혁명가였다. 무력투쟁까지 불사했던 급진주의자였다. 그런데 그가 사형 구형을 받던 날, 소련이 붕괴했다. 그리고 그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잡혔을 때 살아나올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노동자란 말만 해도 잡혀가던 서슬퍼런 군사정권에서… 최소한 20년 정도는 감옥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담담했어요. 어려서부터 힘들게 자라선지 바꿀 수 있는 건 철저히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이었지요.”

감옥에서 다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었을까.

“사회주의 혁명만이 인민 해방의 지름길이라 믿었는데… 길을 잃고 만 거지요. 하지만 소련과 우리는 다르다는 건 핑계일 뿐이었어요. 왜 그럴까, 내가 무엇을 못 보았을까. 현실을 정직하게 성찰하고 오류를 반성해야 했습니다.”

그의 교도소 생활은 묵상과 기도로 시작됐다.

“사형 구형을 받았더니 칫솔이고 속옷이고 다 없어졌습니다. 사형수 물건을 지니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 때문이었지요. 거기서 나처럼 고통이 큰 사람의 기도발이 세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치열한 반성이 뒤이었다.

“아침도 안 먹고 하루 15시간씩 공부했어요. 사회주의 붕괴 후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몸이 망가져도 봄에 보름 정도 단식하면 좋아졌어요. 역시 비움만큼 좋은 게 없더라고요. 비우면 다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그걸로 부족했어요. 거의 환갑이 돼 나올 것 같은데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고살려면 건강해야 하겠더라고요. 교도소장에게 제안했지요. 규칙 잘 지키고 단식투쟁 같은 거 안할 테니 운동할 수 있게 해달라고요. 얘기가 잘될 것 같더니 어느 날 교도관들 표정이 달라졌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안기부에서 ‘박노해 저러는 건 전형적인 빨갱이의 통일전선전술’이라고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래도 결국 하루 2시간씩 달리기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그를 고문했던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어찌 됐을까 궁금했다.

“24일 동안 고문받고 15일 동안 계속해 잠을 못 잤어요. 정말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고문한 그 사람들을 미워하면 못 살았을 겁니다. 오히려 연민의 정이 들더라고요. 다 불쌍한 사람들이잖아요. 아무리 밥벌이로 그짓을 한다 해도 인간은 영혼을 배반하지 못합니다. 야수로 변했다가도 나중엔 눈물 흘리고 몰래 손도 잡아주고….”

그렇다면 다 용서했을까.

“나중에 찾아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 용서했지요. 지금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내게 사형을 구형한 검사입니다. 청문회 전에 전화 걸어와 내게 안부를 물었습니다. 또 내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사는 지금 나눔문화의 고문으로 있습니다.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악연도 순연으로 바꿔 나가는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사실 맞는 놈이 더 편해요. 고문한 사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고… 개인적으로는 다 용서했지만 사회적으로는 과거가 떳떳이 밝혀지고 청산돼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현실의 머리채를 잡고 과거를 끌고 들어가 미래를 망치고 말지요. 하지만….”

민주화 유공자 보상이 있긴 했다.

“신청을 하라더라고요. 그것도 최대한도로 신청하라고. 그 자리에서 신청서를 찢어버렸어요. 당장 내일 닥쳐올 숫자(필요한 돈) 생각을 떨칠 수 없었지만 사랑이 어떻게 숫자로 계산되는가, 혁명이, 청춘과 영혼이 어떻게 돈으로 보상되는가 화를 참을 수 없었어요. 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청산돼야 하는 거지요. 그래야 공동의 선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인정받고 인간성에 대한 규범이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않겠어요.”

그의 혁명은 끝이 났는가.

“나는 급진주의자이면서 진정한 보수입니다. 고향, 농민, 전통, 아날로그, 도리, 원칙 이런 걸 늘 생각하는 꼴보수지요. 지금 고민하고 있는데 자격이 있다고 생각이 들 때 무섭게 얘기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주의자’가 되지 말고 ‘위주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죠. 골수 채식주의가 아니라 채식 위주의 식사가 건강에 더 좋듯 말이지요.”

그의 눈에 북한은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했다.

“‘나는 무섭게 변하는 중국과 무섭게 변하지 않는 북한을 머리 위에 얹고 산다’는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인민의 자율성을 깨뜨리고 인민이 자기 삶을 책임지지 않는 사회는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과 내가 찾는 지역들은 고통의 동심원에 있는 셈이죠. 할 수만 있다면 북한의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싶습니다.”

“69억 인구 비춰보면 국내엔 더 이상 가난한 사람 없다”

카메라 든 오늘의 평화활동가

오늘날 박노해는 평화활동가다. 1998년 출소 후 12년여 동안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과 빈민촌을 찾아다니며 전쟁에 찢기고 가난에 찌든 사람들을 위로해 왔다. 그때마다 카메라가 있었다. 시인이자 혁명가가 펜 대신 카메라를 잡았다.

“국경만 넘으면 언어의 벽에 부닥치잖아요. 말로는 심장에 담긴 언어가 전달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나 사진을 찍어 보여주고 통역에게 물어보면 99% 의미가 전달됐어요.”

노동자였다가 8년 가까이 수감됐던 그다. 언제 사진 찍기를 배웠을까.

“처음엔 자동 똑딱이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어요. 무심코 셔터를 눌러대면서 배웠죠. 약자들은 카메라를 필요로 하고, 강자들은 카메라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후배 사진작가가 있었지만 잘 찍는 기술을 배운 적은 없다. 대신 “카메라만 바꾸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돈을 꿔서 수동 라이카 카메라와 35㎜ 렌즈를 샀죠. 그 빚을 갚는 데 5년 걸렸어요. 고장 잘 안 나고 쇠로 만들어져 튼튼하거든요. 내가 추구하는 단순·단아·단단함의 ‘3단 철학’과도 맞고. 내가 글로벌 동네북(분쟁지역을 다니다 보니 현지 권력으로부터 폭행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인 내 몸을 대검이나 곤봉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도 하고….”

디지털 카메라가 편할 텐데 필름 카메라를 고집한다.

“사실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 아직도 갈등 중이에요. 하지만 사진작가들과 토론하면서 도구에 대한 철학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한계를 둬야겠다는, 너무 편해지지 말아야겠다는…. 영혼의 교감이 달라요. 필름 카메라는 셔터를 함부로 누르게 되지 않죠. 줌도 안 돼 발로 다가가야 하고. 그러다 보니 더 친해지고…. 그야말로 사랑하는 만큼 보이는 거지요.”

그에게 사진은 작품이 아니다.

“예술 냄새가 나면 오히려 찍지 않아요. 나는 그저 지구마을 동네 사진사인 셈이죠. 폭격 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사진을 찍어주는…. 그 사진이 주민등록 사진도 되고, 영정 사진도 되고….”

그에게 사진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도구다. 조리개를 열 듯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간다.

“말 안 해도 눈빛만 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왔는지 다 알아요. 나중엔 외간남자들을 벌레 보듯 하는 차도르 여인들이 손을 끌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차와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비행기 값만 있으면 돼요. 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니까.”

카메라 빚 갚는 데 5년 걸린 사람이 비행기 삯은 어떻게 마련할까.

“2000년에 만든 시민운동단체 나눔문화 회원이 지금 2000명이 넘어요. 그분들이 매달 회비를 내주시고, 또 저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기부도 하고… 내 사진을 사서 소장하길 원하는 분들도 있고… 사진을 판 돈은 그 사진을 찍은 지역의 평화활동 기금으로 쓰입니다.”

나눔문화에 대해선 알려진 게 적다.

“처음부터 정부 지원 안 받고, 기업 기부 안 받고, 언론 홍보 안 한다는 원칙을 세웠어요. 자기 자리에서 삶의 소중한 원칙을 놓지 않는 사람들, 국경 너머에도 책임을 느낄 줄 아는 글로벌 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였지요. 원칙은 멋있었는데 처음엔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눈을 외국으로 돌렸을까. 국내에서는 문제가 해결됐다는 뜻일까.

“감옥에서 나오니까 갑자기 유명해져 있었어요. 잊혀지는 시간이 필요했죠.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유명해지는 것 조차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실패한 혁명가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에게 부끄러웠습니다.”

동료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보다 더 슬프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눈이 갔어요. 국경 너머 더 어려운 현실이 있는 곳 말이지요. 발 밑을 돌아봐야 해요. 69억 인구에 비춰보면 국내엔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없어요. 아직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죠.”

지구시대, 생태위기의 시대에 인류 전체를 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자기 문제 다 해결하고 언제 남을 돌아볼 수 있겠어요. 가난한 나라 외면하는 것은 자살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와 나눔문화 회원들은 전 세계 분쟁지역과 빈민촌 120여 개 마을에 도서관을 지어주고, 나무를 심고, 염소를 사 주는 지원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박노해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압축 성장으로 사람들이 돌아갈 곳, 고향이 다 사라져버렸잖아요. 세계화와 금융위기 이후 삶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탐욕의 포퓰리즘에 빠져버렸지요. 자식들을 괴롭히지 않는 부모가 없을 정도지요. 야생마였던 젊은이들이 어느 날 경주마가 돼버렸어요. 하지만 트랙을 달려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달리는 게 트랙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초원으로 나가야 하는 거지요. 내가 찾아가는 곳은 그러한 고향의 마지막 씨알 종자를 가지고 있어요. 나는 그것을 우리나라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내가 먼저 살면서 대안적 모델을 모색하는 거지요. ”

“컴퓨터로 쓰면 쥐어짜는 시, 펜으로 쓰면 터져나온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한 시인

무엇보다 그는 시인이며 앞으로도 시인일 것이다.

“몸이 아프면 아픈 것 말고 다른 생각은 안 들잖아요. 그런 것처럼 중동같이 21세기 인간 고통이 가장 집약된 지역들로 시적 본능이 나를 이끌더라고요.”

시는 처음부터 본능이었다.

“‘노동의 새벽’도 시집을 내려던 게 아니었지요. 하루 4시간 자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매일 같은 노동, 이러다간 기계가 되겠다는 느낌이 들어 끼적거려 놨는데 동료들이 보고, 돌려보고, 나중엔 필사해서 보고 했던 거예요. 그때 내가 여공들에게 인기 많았지요(웃음).”

그런 본능을 일깨워 준 사람들이 있었다. 어머니, 동네 형들이었다.

“어릴 때 머슴일 하던 형이 나뭇짐을 해오는 길에 진달래꽃을 내밀며 말하는 거예요. ‘참꽃이다. 먹어 봐라. 이게 겨울을 살았단 말이다. 배 부르진 않아도 속이 환하지야?’ 마당 쓸기를 마친 어머니가 감나무를 툭 치더라고요. 햇살 머금은 이파리가 우수수 떨어지는데 어머니가 말씀하셨지요. ‘가을이 참 고요하지야?’ 그런 게 시지요. 공연히 미학이니 인문학이니 따져 들어가면 그 순간 족쇄에 걸려 넘어지고 말아요.”

그래선지 그는 요즘도 만년필로 시를 쓴다. 그것도 치열하게 쓴다.

“컴퓨터로 쓰면 쥐어짜게 돼요. 펜을 쓰면 안에서부터 터질 듯 밀려 나오는데… 그래도 글 쓰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목숨을 건 결단이랄까. 조금 더 깊이 파고 싶은데 나올 수 있을까, 이걸 쓰고 나면 죽지 않을까. 이렇게 쓰고 나면 온 힘을 소진해 며칠씩 일어나지 못하는 때가 있어요. 그럴 때 (그가 박노해인 줄 모르는) 이웃들이 미음을 들고 찾아오고 동네 아이들이 ‘카메라 아저씨, 일어나요. 꽃 보러 가요’ 말하면 내가 잘 살아왔나 보다 안도하지요.”

그렇게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시가 5000편이다. 그중 300편을 골라 곧 시집으로 펴낼 예정이다.

“첨단기기를 안 쓰는 건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섭니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날 수 없을지 모르니까요. 옛날 전동타자기 같은 건 내가 제일 먼저 썼을 거예요. 하지만 곧 도구 효율성을 넘어서는 이 첨단기기들이 더 좋은 시간을 만들었는가, 더 심오한 시대정신을 창조했는가를 회의하게 됐지요. 어떤 첨단기기도 인문적 통찰과 아날로그적 사고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런 걸 이룰 수 없습니다. 인터넷도 안 쓰고 휴대전화도 없지만 첨단 흐름에 대한 연구는 많이 해요. 신문 5개를 구독해 스크랩과 서브노트를 해가며 읽지요.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나눔문화의) 젊은 연구원들도 폭넓은 지식에 대해선 나보다 한 수 아래죠.”

감옥에서 서태지 노래를 듣고 탄성을 지르던 그였다.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과는 거리가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아요. 지난번 작가와의 대화 때 40명 정도 예상했는데 120명이 몰려왔어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가수 윤도현 주례사를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죠. 엄마·아빠의 시집을 보고 자기도 울었다는 친구들도 있고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그의 시 ‘참사람이 사는 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손해 보더라도 착하게/ 친절하게 살자/ 상처 받더라도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살자/ 뒤처지더라도 서로 돕고/ 함께 나누며 살자/ 우리 삶은 사람을 상대하기보다/ 하늘을 상대로 하는 거다/ 우리 일은 세상의 빛을 보기보다/ 내 안의 빛을 찾는 거다’.


j 칵테일 >> 빨간 양말 … "내 열정은 발바닥에 있죠”

인터뷰 도중 검은색 일색인 박노해씨의 옷차림에서 빨간 양말이 문득 눈에 띄었다. “왜 빨간 양말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내 열정은 발바닥에 있다”고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러곤 “사랑은 발바닥”이라고 했다. 무슨 얘긴가. 그는 늘 현장을 중시했다. 노동 현장에서 시작해 국경 너머 분쟁·빈곤 현장을 뛰어다니며 그는 “언제나 진실은 현장에 있다. 현장이 변하면 진실도 변한다”고 주장해 왔다. “내 아름다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다”는 최근 그의 글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나는 ‘발바닥 사랑’만을 믿는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더 변덕스럽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간다.” 턱수염도 화제가 됐다. 그는 “이건 내 마음의 그린벨트”라며 “밀어붙이는 토건 개발을 반대한다는 뜻”이라고 웃었다. “오지 어린이들을 안아 장난스럽게 비벼주면 재미있어 하더라”고 했다.

●박 노 해

1957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

1983년 동인집 <시와 경제> 통해 등단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80년대 노동문학의 총아로 부상

1991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

1998년 8·15 특별사면으로 석방

주요 시집엔 <참된 시작>, 산문집엔 <사람만이 희망이다><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 등

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現] 시인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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