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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봉 기자의 도심 트레킹 ⑫ 정동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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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길의 들머리에 있는 이화여고 돌담길. 대한제국 초기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들이 모여 있는 ‘브릭로드’이기도 하다.

걷기 열풍이 불기 이전에도 걷기 좋은 길은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덕수궁 돌담길이다. 노래가사와 영화 배경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길이다.

덕수궁 돌담길은 정동길과 맞닿는다. 덕수궁 대한문 옆 골목에서 시작해 주한 미국영사관 건물을 거쳐 구세군본영으로 이어지는 덕수궁길, 서울시립미술관 앞 로터리에서 경향신문사까지 이어지는 정동길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호젓하고 낭만적인 정서가 서로 통한다. 이 길은 또 북적이지 않는 편이라 산책에 가장 잘 어울린다. 주변도 잘 정리돼 있어 ‘걷기 좋은 길’을 설문할 때면 항상 맨 앞을 차지하곤 한다.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어 가을에 가장 아름답지만, 그 어느 때 걸어도 한결같이 운치가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이 길이 바로 근대 한국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동길은 근대문화유산의 집결지다. 1900년을 전후로 들어선 건물들이 수두룩하다. 당시 지어진 건물은 대개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근대화가 되면서 규격화된 건축자재가 쓰이기 시작했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벽돌이다. 특히 내구력이 좋고 단호한 인상을 주는 붉은 벽돌이 이 일대 건물에 많이 쓰였다. 둘러보면 정동길은 온통 붉은 벽돌로 덮였다. 그래서 정동길은 ‘브릭 로드’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정동길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렇지만 숨겨진 근대화의 명소를 알며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브릭 로드’는 그런 정동길의 매력만을 따와 붙인 이름이다. ‘도심 트레킹’ 이번 회에서는 정동길의 숨겨진 보석 몇 군데를 소개한다.

중명전

정동길의 명소 정동극장 바로 옆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약 30m 걷다 보면 앞쪽으로 고풍스러운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중명전이다. 1897년 황실도서관으로 쓰기 위해 지어졌지만 이후 고종의 집무실로 쓰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고, 외국 영사관의 사교클럽으로 쓰이는 등 가슴 아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1963년 박정희 정부가 영친왕의 왕후인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했지만, 이후 개인적 사정으로 소유권이 다른 이에게 넘겨졌다. 이후 이곳에는 출판사·심부름센터 등이 들어서 있다 2007년 복원공사를 시작해 지난 8월 27일 개관식을 열었다.

미국 공사관

로터리에서 덕수궁 후문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항상 경찰이 지키고 서 있다. 이 길로 조금만 가다 보면 ‘미국 대사관’ 표시가 된 까만 철문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옛 미국 공사관이다. 최초의 외국 공사관으로 188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옥 형태인데 신기하게도 붉은 벽돌로 된 굴뚝이 있다. 한옥의 일부분은 붉은 벽돌로 개조돼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중명전 현관이나 2층 발코니에서 담 너머 공사관 건물을 볼 수 있다. 공사관 정문 앞에서도 굴뚝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이화여고 심슨관

이화여고는 유관순 열사가 다닌 학교로 유명하다. 1886년 세워진 이 학교에 있는 건물 중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1915년 지어진 심슨관밖에 없다. 이 역시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이화여고에는 ‘유관순 빨래터’라는 이름이 붙은 우물도 있는데, 당시 여학생들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특히 인상 깊은 장소는 노천 강당. 콘서트홀 정도의 크기는 족히 되는 널찍한 곳인데, 이곳에 계단 겸 의자로 쓰이는 돌은 바로 서울 성곽에서 나온 것.

옛 러시아 공사관

캐나다 대사관과 예원학교 사이 오르막길을 죽 따라 오르다 보면 나온다. 탑처럼 생긴 흰색 벽돌 건물이다. 이곳은 1896년 있었던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부분의 건물이 부서지고 현재는 탑 정도만 남아 있다. 이 아래에는 지하 밀실과 비밀 통로가 있다고 전해진다.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덕수궁에 드나들기 위해 팠다고 한다. 밀실과 통로에 붉은 벽돌이 쓰였다.

구세군 중앙회관

미국 공사관을 지나 언덕을 넘으면 나온다. 덕수궁 돌담길의 끄트머리에 있다. 돌담길은 알아도 구세군 중앙회관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28년 지어진 이 건물은 현관 앞 4개의 기둥이 유럽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벽은 붉은 벽돌로 이뤄졌다. 당시 부랑자, 영세민에 대한 구호가 이뤄졌던 곳이다.

정동제일교회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다. 1896년 지어진 고딕풍의 건물. 촘촘히 쌓인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데, 돌을 다듬어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의 건축 기법도 엿보인다. 이승만 전 대통령, 서재필 박사 등이 다녔다고 한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은 1885년 개교했지만 동관이었던 이 건물은 1916년 지어졌다.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외국 기숙사 학교를 보는 듯 고풍스러운 느낌이 난다. 김소월이 공부했던 교실, 이승만 전 대통령, 주시경 선생 등의 유품이 박물관 안에 남아 있다. 입장은 무료다. 박물관 앞에는 16m 높이의 향나무가 있는데, 서울시 지정 보호수로 나이가 500살이 넘었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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