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의 나는 이렇게 읽었다] 철강인 박태준의 땀·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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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다고 잔치를 벌여?" 친지의 회갑연 초청장을 받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나라와 환갑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으나, 환갑 잔치에도 나라에의 충성을 찾는 사람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그런 그를 보면 영락없이 '독일 병정'이다. 장군에다 총리까지 지냈는데 병정이라니 이 무슨 망발을! 아무튼 그의 평전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이대환 지음, 현암사, 856쪽, 2만5000원)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독일 장군이라면 누구보다 에르빈 롬멜이 생각난다. 그는 1942년 북아프리카 사막의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에게 패한다. 지략과 용기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탱크만 해도 1:20의 비율로 기우는 전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영일만 모래펄에서 불도저와 크레인으로 제철소 건설 전투를 벌인 박태준은 1973년 고로에서 첫 쇳물을 받아낸다. 국내외의 냉소와 방해가 엄청났지만 제철보국(製鐵報國)의 단심과 뚝심으로 이겨낸 것이다. 포스코역사관에 옮겨 놓은 포철 최초의 건설 현장 사무소 '롬멜 하우스'에는 롬멜 장군의 시련과 고난보다 더한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독일 총리라면 단연 오토 비스마르크가 꼽힌다. 그는 철혈(鐵血) 재상으로 불리지만, 피땀의 희생을 넉넉한 빵으로-호밀로-갚고 세계 최초로 근로자 복지를 다진 철맥(鐵麥) 재상이기도 하다. 박태준은 공기 단축과 완전 시공 독려로 근로자한테 강철 같은 노력과 수고를 닦달했지만, 그 대가로 주택과 교육 등 복지를 돌려주었다. 1991년 모스크바 대학 총장이 사원 주택 단지를 둘러보고는 "레닌 동지가 꿈꾸고 추구한 이상향을 저는 포철에 와서 보았습니다"(262쪽)라며 눈시울을 적셨다니…. 잘못한 부하에게 지휘봉만 내리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과 장래를 챙겨주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아픔이 격려와 용기로 바뀌었을 터이다.

포스코는 세계 철강사에 숱한 기록을 세웠고, 박 회장은 세계 최고의 철강인으로 숱한 상을 받았다. 그러나 승리의 길만 있은 것은 아니었다. 포스코에 외풍을 막아주기 위한 '외도'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의 정계 진출은 좌절의 기록이었다. 특히 양김 대통령에게 '당한' 정치 보복과 실각은 정녕 뼈아픈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연히 과거를 묻고 양김 집권 중에 저질러진 외환 위기와 탈법적 대북 송금이 몰고 온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는 포스코 주식 한 주 가진 적이 없고, 그 흔한 스톡 옵션 한 주 받은 적이 없다. 명예회장실조차 손수 지은 강남의 포스코센터에서 멀리 떨어진 강북의 한 건물에 세 들어 있다.

박 회장에게 보낸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치사대로 "한국에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 그것이 귀하의 삶에 끊임없는 지상 명령"(12쪽)이었는지 모른다. 이 책은 실로 "나는 나라를 사랑했고, 나라에 나를 바쳤어"라고 감히 말할 자격이 있는-우리 주위에 몇 안 되는-인물의 평전이다. 그는 회갑연을 받아도 좋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산업화의 역사와 민주화의 현실이 충돌하는 시대이기에 "독재의 사슬도 기억케 하고, 빈곤의 사슬도 기억케 하라"(843쪽) 박 회장의 외침이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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