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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살 돈 있어도 전세로 … 주택시장 패러다임이 바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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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최근의 주택시장 특징은 집값과 전셋값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다. 전셋값이 오르면 매매값이 덩달아 오르는 게 주택시장의 원칙이었으나 이제 그런 공식이 깨졌다. 지난해 10월 이후 아파트 매매값은 떨어지고 전셋값은 계속 오르는 디커플링(Decoupling: 탈동조화) 현상이 1년째 이어지고 있다. 국민은행 조사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올 들어 9월 중순까지 아파트 매매값은 2% 떨어졌으나 전셋값은 4% 올랐다. 주택수요자들이 아파트를 구입하는 대신 전셋집을 찾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새 아파트 분양시장에는 미분양이 쌓이고, 살던 집을 제때 팔지 못해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지 못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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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더 떨어진다” 매수심리 위축=가장 큰 이유는 아파트 매수심리가 크게 위축된 데 있다. 건국대 부동산학과 심교언 교수는 “아파트값 상승 기대감이 작아지면서 집을 사는 대신 전셋집을 얻는 게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라는 인식이 확산했다”고 분석했다.

이런 데는 배경이 있다. 지난해 가을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와 보금자리주택 분양 등 주택수요는 줄이면서 공급을 늘리는 정책이 동시에 나왔다. 서울 잠원동 강철수 공인중개사는 “소득 대비 아파트값이 너무 높았던 상황에서 이런 정책이 나와 ‘이제 아파트로 돈을 버는 시대는 끝났다’고 판단하는 수요자가 갑자기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실제 국민은행이 매주 일선 부동산 중개업소를 대상으로 조사하는 아파트 매수심리 지표는 올 9월 16.6%로 지난해 같은 기간(60.2%)보다 크게 떨어졌다. 중개업소를 찾은 100명 중 16~17명만이 집을 사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이다. 국민은행이 이 지표를 조사한 2003년 7월 이후 최저치다.

이런 심리는 전세 수요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송파구 잠실이다. 재건축을 끝낸 새 아파트 1만8000여 가구가 2008년 하반기에 한꺼번에 입주한 잠실은 올가을 전세기간 2년 만기가 되면서 전세물건이 많이 나오고 가격도 내려갈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러나 올 6월 3억원대 중반을 형성하던 109㎡형(이하 공급면적) 전셋값이 최근에는 4억원 선으로 뛰었다. 잠실동 최원호 공인중개사는 “집을 살 여력이 있는 사람들조차 전세를 찾으면서 값이 다시 올랐다”고 전했다.

올 하반기 새 아파트 입주 물량이 1만 가구 이상 몰린 경기도 용인시와 고양시도 최근 전셋값은 강세로 돌아섰다. 8월 말부터 입주한 고양시 식사동 일산자이 아파트의 경우 입주 전 1억5000만원 안팎이었던 112㎡형 전셋값이 최근 2억원대로 올랐다. 서울 등 다른 곳에서 새 아파트를 찾아 이동한 수요가 가세했기 때문이다.

◆"탈동조화 현상 장기화 가능성 커”=전문가들은 주택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한 8·29 부동산 대책이 나온 지 한 달이 됐는데도 매수심리가 살아나지 않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탈동조화 현상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다.

또 이런 현상은 주택시장의 패러다임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단국대 부동산학과 김호철 교수는 “정부의 정책기조가 집값 하향 안정화이기 때문에 집값 안정세는 장기화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집주인 입장에선 전세를 월세로 바꾸는 경우가 늘 것 같다”고 예상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세 제도는 집주인들이 집값 상승을 전제로 세입자에게 상대적으로 싸게 집을 빌려주는 방식이다. 따라서 집값 안정세가 장기화하면 집주인 입장에서는 전세를 기피하게 될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 국민은행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전세 반, 월세 반’ 형식인 보증부월세 비율이 42.3%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39.7%에 비해 2.6%포인트 늘어났다.

주택상품으로서 아파트의 인기가 떨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손은경 수석연구원은 “2000년대 들어 아파트값은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에 비해 많이 올랐다”며 “앞으로 아파트값은 하향 안정세를 이어가고 대체상품은 인기가 높아지는 ‘상품별 키 맞추기’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런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서울 아파트값은 1년째 약세를 이어가고 있는 반면 최근 1년새 단독주택과 연립주택 값은 2.2%, 2.1%씩 올랐다.

건설업계에서는 최근 들어 아파트를 분양하는 대신 도시형 생활주택이나 소형 오피스텔 등 아파트를 대체할 수 있는 상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원건설 고광현 사장은 “다양해지는 수요자들의 선호도를 반영해 주택시장에서도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주택 보유자 중 일부가 집을 파는 사례도 늘어날 전망이다. 신한은행 김상훈 부동산전략팀장은 “집값 상승 기대감이 꺾인 상황에서는 보유세 부담 등으로 집이 ‘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파트 분양시장에도 예전과 같은 청약 열풍이 불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청약 열풍이 불었던 것은 계약 후 2~3년 뒤인 입주 시점에 시세차익을 기대하는 수요가 많이 몰렸기 때문인데 전체 주택시장이 안정되면 이런 기대감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국민은행 박합수 부동산팀장은 “당분간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매입하는 것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함종선 기자

◆디커플링(Decoupling : 탈동조화)=수출과 소비, 주가와 환율 등 밀접하게 관련된 경제요소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말한다. 국가 간 서로 다른 경제 흐름을 보이는 것도 디커플링이라 한다. 전셋값이 오르면 매매값도 따라 오르는 게 일반적인데 요즘은 달리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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