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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193> 한가위 음식에 담긴 선조의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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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백물이 성숙하는 추석엔 햅쌀·햇곡식·햇과일 등 먹을거리가 풍성해 마음까지 넉넉해집니다. 조선 순조 때 한양 풍습을 기록한 『열양세시기』에는 “가난한 집안에서도 쌀로 술을 빚고 닭을 잡아 찬을 만들며 온갖 과일을 풍성하게 차린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조상의 음덕을 기리기 위해 차리는 차례 상엔 햇과일·송편·토란탕·닭찜·신곡주 등이 오릅니다. 한가위 절기 음식 속엔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어요.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한가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송편이다. 이 떡은 찰기가 적은 맵쌀을 가루 내 익반죽하고 녹두·콩·깨 등으로 소를 채워 빚은 뒤 솔잎을 깔고 찌면 완성된다. 우리 조상은 송편을 먹으면 소나무처럼 건강해진다고 여겼다. “가을 맛은 송편에서 오고 송편 맛은 솔 내에서 온다”는 말도 있다.

송편

추석 날 먹는 송편을 오려송편이라 한다. 오려는 올벼(햅쌀)를 뜻한다. 문헌에 송편이 언급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1680년 『요록(要錄)』에 송편은 “백미가루로 떡을 만들어 솔잎과 켜켜로 쪄서 물에 씻어낸다”고 기술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송편은 맵쌀가루에 무엇을 첨가하느냐, 소로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모시잎 찧은 것을 섞어 반죽하면 모시잎송편, 송기·도토리가루·칡가루·호박가루를 섞으면 송기·도토리·칡·호박 송편이 된다.

지역 고유의 송편도 있다. 강원도에선 감자송편·무송편(무생채 첨가), 경상도에선 모시잎송편, 전라도에선 삐삐떡(삘기송편, 띠의 어린 새순 첨가)을 먹는다. 황해도 등 북쪽에선 송편을 크게, 서울·경기에선 작게 빚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부터 민간에선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처녀는 좋은 신랑감을 만나고 임신부는 예쁜 딸을 낳는다”는 말이 전해졌다. 또 “덜 익은 송편을 깨물면 딸을 낳고 잘 익은 송편을 깨물면 아들을 낳는다”고 했다. 송편 속에 솔잎을 가로로 넣고 찐 뒤 한쪽을 깨물어서 솔잎의 귀 쪽이면 딸이고, 뾰족한 끝 쪽이 오면 아들을 낳는다고도 믿었다.

인절미도 추석 전후에 즐겨 먹은 떡이다. 인절미는 찹쌀(찰기가 많은 쌀) 고두밥을 시루에 쪄서 안반이나 절구에 친 다음 가늘고 길게 또는 네모나게 썰어 고물을 묻힌 것이다. 한자명은 인병(引餠). 차진 찰떡을 늘여 끊은 맛있는 떡이라는 데서 인절미란 이름이 붙었다.

인절미는 찹쌀 외의 부재료에 따라 대추·깨·쑥·차조·감·동부인절미로 나눌 수 있다.

송편·인절미는 간식거리다. 추석 온가족의 밥상과 차례 상에 오르는 주식은 햅쌀밥이다.

추석 전에 출시된 햅쌀은 조생종이다. 쌀은 수확된 후에도 호흡을 계속한다. 쌀은 호흡 도중 자체 영양분을 소모한다. 묵은 쌀보다 햅쌀이 영양적으로 월등한 것은 이래서다.

토란국

한가위의 국물 음식은 쇠고기 양지머리 육수에 토란을 넣고 끓인 토란국이다. 토란탕·토란곰국도 같은 말이다. 추석 때 토란국을 즐긴 것은 『농부월령가』 8월령에도 나와 있다. “신도주·올벼송편·박나물·토란국을 선산에 제물하고 이웃집 나눠 먹세”라는 대목이다. 토란(土卵)은 ‘흙 속의 알’이란 뜻이다. 연잎처럼 잎이 퍼졌다 하여 토련(土蓮)으로도 불린다. 추석 무렵의 토련이 영양·맛 모두 최고다. 국을 끓일 때는 토란을 소금이나 쌀뜨물에 삶아낸 후 넣는다. 그대로 국에 넣으면 색이 파래지고 미끈거린다. 토란엔 소화를 돕고 변비를 예방하는 성분이 들어 있다. 과식으로 배탈 나기 쉬운 추석에 유용한 채소다.

추석 전후에 유난히 향이 좋은 것이 송이버섯이다. 송이는 적송(赤松) 숲에서 주로 발견된다. 인공 재배가 안 돼 귀하고 비싸다. 송이 향의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조리할 때 짧은 시간 내에 씻고, 가능한 한 양념 사용을 줄이며, 살짝 굽고, 잠깐 익히거나 끓여야 한다.

송이를 파·마늘·참기름·간장으로 양념해 숯불에 구운 것이 송이적이다. 쪼갠 송이를 파·마늘·후춧가루·참기름으로 양념한 것과 양념한 고기를 섞어 꼬챙이에 꿰어 구운 것이 송이산적이다. 적당한 길이로 썬 송이를 간장·참기름·후춧가루로 양념해 꼬챙이에 꿰고 밀가루를 살짝 바른 다음 계란옷을 입혀 기름에 지진 것이 송이누름적이다.

송이가 들어간 추석 절식은 송이적 외에도 송이전골·송이찜 등 다양하다. 송이전골은 전골냄비에 송이, 표고, 양념한 쇠고기, 미나리 초대 등을 넣고 장국을 부어 끓인 음식이다. 송이는 추석 음식의 고명으로 써도 맛깔 나고 멋스럽다.

우리 음식에서 적(炙)은 구이를 가리킨다. 화양적과 누름적도 추석의 절식이다. 화양적은 버섯·도라지·쇠고기·표고에 갖은 양념을 한 뒤 익혀서 꼬챙이에 끼운 음식이다. 누름적은 화양적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되 밀가루나 달걀을 묻혀 지진 것이 차이다.

한가위 찜 요리로는 닭찜이 있다. 한자명은 계증(鷄蒸)이다. 가을은 닭이 살이 올라 가장 맛있는 계절이다. 추석엔 햇닭에 양념을 넣고 푹 삶은 닭찜을 차례 상에 올리거나 절식으로 즐겼다.

도라지 나물, 고사리 나물, 시금치 나물(위쪽부터)

추석 차례 상에 자주 오르는 채소는 도라지·고사리·시금치 등 삼색 나물이다. 새 나물 모두 채소 중에선 단백질이 풍부하다.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던 옛 사람들에게 고마운 채소였다. 한방에서 도라지는 감기·편도선 등 호흡기 질환의 약재로 쓰인다. 고사리는 설사·해열·이뇨 효과, 비타민 C가 풍부한 시금치는 술독을 풀고 피부를 윤기 나게 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숙주나물(녹두나물)도 추석의 절식이다. 콩나물 기르듯이 녹두를 시루에 담고 물을 주어 싹을 틔워 기른 것이 숙주나물이다. ▶숙주의 꼬리를 자르고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치고 데친 뒤 ▶냉수에 헹궈 적당히 짠 다음 ▶갖은 양념을 넣고 무친다 등 4단계를 거치면 숙주나물이 완성된다.

우리 선조는 추석 무렵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나물을 말려 두었다. 정월 대보름 절식인 진채(묵은 나물)는 가을에 박고지·호박고지·호박순·고구마순 등을 거두어 말려둔 것이다.

차례 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가는 과일은 조율이시(棗栗梨枾, 대추·밤·배·감)다. 네 과일은 모두 가을이 제철이다. 대추는 제상의 첫 번째 자리에 놓인다.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혼례를 마친 새색시의 치마폭에 시부모가 대추를 한 움큼 던져준다. 한 그루의 대추나무엔 수많은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노화 억제 과일로 간주된다. “대추 보고 안 먹으면 늙는다”는 말도 있다. 환갑상에 대추가 단골로 오르는 것은 이래서다. 대추의 비타민 C함량은 귤의 7배 이상이다. 비타민 C는 노화의 원인인 유해산소를 없애주는 항산화 비타민이다.

대추 바로 옆에 놓이는 밤은 차례 상의 홍동백서(紅東白西) 원칙에 의하면 붉은색 식품에 해당한다. 그러나 속살이 노래서 영양학에선 노란색 식품으로 분류한다. 밤의 속살이 노란 것은 카로티노이드라는 색소 때문이다. 귤·당근에도 들어 있는 카로티노이드는 대추의 비타민 C처럼 유해산소를 제거한다.

밤을 재료로 만든 추석 절식은 밤단자(율단자)·율란·밤초 등이다. 밤단자는 밤을 이용해 만든 떡이다. 찹쌀가루를 쪄서 계란같이 둥근 떡을 만들고 삶은 밤을 꿀에 개어 붙이면 완성된다. 밤 대신 토란을 사용한 토란단자도 추석에 먹는다. 밤은 지루한 귀경길에 먹으면 효과적이다. 생밤은 차멀미로 거북해진 속을 달래 주는 효과가 있다.

배는 백색 식품이다. 소화를 돕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회나 불고기를 잴 때 배를 섞으면 고기가 연해지고 소화가 잘된다. 갈증이 나거나 주갈(酒渴)이 날 때도 유익하다. 배는 또 변비 예방에 좋은데 이는 체내에서 소화되지 않는 석세포 덕분이다.

이런 점에서 배는 평소보다 과식하기 쉬운 추석에 요긴한 과일이다. 특히 배를 통째로 또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삶은 뒤 꿀물이나 설탕물에 담근 배숙이 그렇다. 배숙은 곶감 대신 배를 넣었다 하여 배수정과, 익힌 배라 하여 이숙(梨熟)이라고도 한다. 작은 배에 후추를 박아서 끓인 것이 향설고(香雪膏)다.

추석 때 감은 숙취제거용으로 유용하다. 감의 타닌(떫은 맛 성분)이 알코올의 흡수를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또 위의 열독(熱毒)을 제거하고 갈증을 멎게 한다. 소변을 수월하게 해 술을 빨리 깨게 하는 효능도 있다. 추석 때 술안주로 감을 추천하는 것은 이래서다. 그러나 홍시는 위통을 일으킬 수 있고 술에 더 취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 선조는 감을 기침·딸꾹질 해소에 좋은 과일로 여겼다.

절식과 함께 곁들이는 한가위의 절주는 정성껏 빚은 가배주다. 추석에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즐기면서 마셨다고 해서 가배주다. 가배(嘉俳)란 가위의 옛 말이며 팔월 한가위의 어원이다. 궁중·양반가에선 추석 때 햅쌀로 빚은 신도주(新稻酒), 서민·농가에선 가전비법으로 빚은 농주(農酒)를 가배주로 즐겼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신도주는 제주(祭酒)이자 잔치 술이다. 백주(白酒)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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