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 '노래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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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곳은 여자가 노예처럼 묶여지고 부려지는/남자들의 나라다/선녀는 떠났다 사슬을 풀고'.

믿어지는가. 이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던 심수봉(50)의 노래라는 것이. 심수봉이 최근에 낸 열 번째 앨범 '꽃'에서 가장 아끼는 곡인 '남자의 나라'다. 이 노래로 가부장제만 비판한 게 아니다.

'저 선비 왜 공부했나 사투리 나라 패싸움 말고/자손들에겐 인색과 분노도 대물림 마오'라며 정치판에도 일격을 가한다.

"과거사 청산 등 여러 이슈와 숙제가 있죠.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가정을 바꾸는 거예요. 가사분담부터요. 여자는 종 같잖아요. 젊은 사람들이야 다르다지만…."

이번 앨범에도 리메이크 해 수록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밖엔 난 몰라' 등 그녀는 지금껏 남자에게 기대는 수동적 여성상을 그려왔다.

"제가 아버지 없이 자란 탓에 아버지 같은 절대적인 보호자로서의 남자를 갈망했어요. 그래서 노래 소재가 다 사랑, 남자였어요. 결혼에 한 번 실패한 것 역시 부성 콤플렉스 때문인지도 모르죠."

생각이 달라진 건 지난 2002년부터 재즈를 배우기 위해 2년간 뉴욕에 살면서부터. 남녀가 서로 돕는 가정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시각은 바뀌었지만 재혼 12년차인 그녀의 삶은 그대로다. 이번 설 명절 때 "여자는 일하고 남자는 받아먹는 모습도 바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일요일 아침 정도는 남편이 간단하게 차려주는 게 소원이었는데 아직 이뤄지지 않았죠. 밥 퍼달라는 걸 갖고 분노할 정도니 벽이 높지요."

남편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음반에 이 곡이 들어가는 걸 꺼렸다. 그러나 작사.작곡은 물론 편곡도 혼자 하고 녹음도 따로 해 기어이 집어넣었다.

"제 삶과 호흡하는 노래거든요. 더 나아가 많은 여성에게 힘이 됐으면…. 솔직히 제 또래 여성들이 전부 궐기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이혼하란 말은 아니에요."

사실 이 노래의 힘은 가사에서 그치지 않는다. 재즈와 국악을 접목시킨데다 당김음(싱커페이션)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대곡이다.

그녀는 "대~한민국이란 응원 박자가 바로 재즈에서 많이 쓰이는 당김음이죠. 정박으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이웃나라 박수와 달리 멋들어져요. 긴장감, 심지어 불안과 공포까지 느끼게 하죠"라며 신이 나서 곡을 설명한다.

"뉴욕의 재즈 선생님들은 '우리가 가르치긴 하지만 당신은 오히려 우리가 배울 걸 갖고 있다'며 깍듯이 대접해줬어요. 일반 시민들도 음악인을 예우하더군요. 반면 우리나라에서 음악 하는 사람은 곳곳에서 상처 입기 일쑤죠."

만약 그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10.26 사건의 현장에 없었다면, 그래서 더 자유롭게 음악을 했다면 이런 작품이 진작에 나오지 않았을까.

그녀는 10.26을 소재로 한 영화 '그때 그사람들' 논란에 대해 "그 사건이 내 생활이나 음악활동에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영화도 보지 않을 작정입니다"라고 말했다.

심씨가 생각하는 음악과 정치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정치란 저에게 있어서 뭘까…. 괴로움과 고통을 줬죠. 하지만 제가 정치인에게 줄 수 있는 건 음악이지요. 음악은 사람을 위로해주고 풍요롭게 하고 희망을 주는 좋은 거잖아요. 정치랑 비교할 수 없죠. 그래서 저도 자긍심을 느껴요."

글=이경희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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