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국가 인력수급계획 시급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대학생들이 대통령이 명심할 올해의 사자성어로 경국제세(經國濟世)를 선정했다고 한다. 불황의 장기화라지만 나라가 도탄에 빠진 정도는 아니다. 굳이 국가를 잘못 통치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구태여 따진다면 구제할 백성은 많다.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 솥단지를 내팽개친 영세 음식점 주인, 400만명이 넘는 신용불량자, 부실 도시락도 아쉬운 결식아동, 추운 날씨에 등걸잠이 불가피한 노숙자….

대학생의 안목으로 시국 대소사를 감안한 말이겠지만 경제를 살려 제발 취직 걱정을 덜어달라는 뜻이 더 강하다. 지난해 대학졸업자의 취업률은 최근 4년간 최저 수준인 56.4%다. 10명의 청년 중 4명이 사회 첫 출발을 '백수'로 시작하는 것이다. 경제 침체, 신규 투자 부진, 일자리 축소의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는 한 청년실업은 고착화할 전망이다. 경기가 상승세를 타면 대졸의 구직난은 해소되겠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가능성이 크다. 경제가 매년 5%씩 성장한다 해도 적정 규모보다 넘치는 대졸자 모두에게 일감을 안겨줄 수는 없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국가의 인력수급 정책이 주먹구구식인 데다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81.3%다. 미국은 63.3%, 일본은 49.1%에 불과하다. 경제력에 비해 한국이 매우 높은 셈이다. 1990년 한국의 진학률은 33.2%로 일본 36.3%, 미국 59.9%보다 훨씬 낮았다. 그때도 대졸자의 실업이 현안으로 대두했지만 지금처럼 심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5공 시절 졸업정원제가 실시되면서 대학생 숫자는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다. 정원보다 많이 입학시키되 엄격한 학사관리를 통해 초과분을 탈락시킨다고 했지만 탈락자가 자살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모두에게 졸업장을 주고 만다. 졸업정원제는 단지 대학문을 넓혀 학부모에게 대학 진학 과외 비용을 줄여주는 효과만 노렸을 뿐이다. 증가하는 대졸자를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게 당시의 현실이다.

96년 대학설립 준칙주의가 도입되면서 대학이 난립하고 학생은 폭증한다. 95년 131개였던 대학이 지난해는 171개로, 교육대와 산업대를 포함하면 4년제는 200개에 이른다. 법정 최저 기준을 충족하면 대학 설립을 허용한다는 준칙주의의 명목은 번지르르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학 신설을 둘러싼 정치권과 지자체, 교육 모리배의 압력을 피하기 위한 교육부의 자구책이라는 속내가 드러난다. 그 결과, 10년 사이에 대졸자가 2.5배나 증가해 대학교육의 보편화는 달성한다. 하지만 취업 눈높이가 높은 고학력자를 양산할 뿐 정작 기업체에 쓸모있는 인재 배출에는 실패해 대학교육에 대한 불신이 작금의 화두가 되고 있다.

대졸 무직자 문제는 단순히 일자리 공급을 확대한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먼저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을 설정하고, 산업의 수요에 부응하는 국가 차원의 인력수급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계획에는 기술 혁신, 가속화하는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제조업 비중 감소 등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인력 양성과 수급 대책이 담겨야 한다. 특히 출산율 저하로 인한 경제활동인구의 감소에 대한 방안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그런 연후에 대학을 구조조정하고 교육과정을 개혁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대학정원 감축과 통폐합 방침은 당장은 생존위기의 대학을 구제하고 졸업생을 줄여 실업률을 낮출 수는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인력수급 전망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또다른 실패는 불보듯 뻔하다.

도성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