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35. 춘향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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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2000년 칸 영화제에서 '춘향뎐' 시사회를 마치고 찍은 사진. 왼쪽부터 필자, 배우 이효정, 임권택 감독, 배우 조승우, 정일성 촬영감독.

'아! 이제 됐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구나. 더 이상 여한이 없다.'

2000년 5월 프랑스 칸 영화제의 '춘향뎐' 시사회장. 영화가 끝나기 무섭게 10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순간 내 의식은 강력한 마약 주사라도 맞은 듯 구름 위를 떠돌았다. 지나간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이거였나. 이런 것이었나. 오매불망 바랐던 칸의 꿈이 이런 거였나.' 물거품 같기도, 벅찬 환희 같기도 한 복잡한 감정이 혈관을 타고 돌았다. 5분이 되고 10분이 지나도 박수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임 감독, 나갑시다. 우리가 자리를 안 뜨면 끝이 안 날 것 같소." 문을 밀고 나오자 로비에서도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칸에서 그날 하루는 '춘향뎐'의 날이었다. 검정 선글라스를 쓴 보디가드의 호위를 받으며 호텔 앞에 늘어선 검정 세단에 몸을 싣자 도로변에 있던 각국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었고, '춘향뎐'의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붉은 카펫에 발을 올리니 수백 대의 카메라에서 일제히 플래시가 터졌다.

그날 밤 생맥주를 마시며 길가에서 파티를 한 뒤 호텔로 오는 길에 임권택 감독이 속삭였다. "이 사장, 장님이 지팡이 하나 들고 참 먼길을 돌아왔구려." 세계 최고 권위의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코끼리 만지듯 더듬어 온 지난 시간에 대한 회고이기도 했고, 이제는 개안(開眼)을 해서 뭣 좀 알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실 '춘향뎐'을 만든다고 할 때 주위에서는 이런 말들을 했었다. "태흥영화사가 제정신이 아니군. 지금이 어느 땐데 구닥다리 영화를 하려고 그래?" 영화계에 금융자본이 들어오고 젊은 제작자와 신인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한다며 분위기가 들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가져오는 시나리오들을 보면 겉만 그럴싸할 뿐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러던 중에 임 감독이 "판소리 뮤지컬 형태로 '춘향뎐'을 해보겠다"고 하자 나는 무릎을 탁 치면서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봐라, 얼마나 참신한 발상이냐. 나이만 젊다고 새로운 영화가 나오는 줄 알아?"

영화제 마지막 날 호텔 로비에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다. 우리 옆에는 홍콩 왕자웨이(王家衛)감독의 '화양연화' 팀이 있었다. 영화제 측에서는 폐막식에서 수상할 작품은 미리 연락한다. 어떤 상이라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시상식에 꼭 참석하라'고 통보하는 것이다. 조금 있으니 옆자리에서 "와"하는 함성이 일었다. 그러나 우리 팀에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약이 올랐다. 평소 입버릇처럼 "칸에만 나가면 은퇴하겠다"고 했지만 맨손으로 끝내기엔 아깝다는 오기가 났다. 상은 하나 타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다행히 그 꿈이 이뤄지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2년 뒤 '취화선'으로 임 감독이 감독상을 받은 것이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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