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창호 충격의 3연패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세계 바둑사의 신화 이창호9단이 '충격의 3연패'를 당했다. 불과 3연패 아니냐 할 수 있지만 이를 놓고 국내는 물론 중국에서도 분석이 한창이다.한계를 모르던 이창호도 서른의 나이가 되면서 드디어 어느 지점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하여 눈에 불을 켜고 그의 기보를 살펴보고 있다.

국수전 도전기 첫판(10일 서울)에서 최철한9단에게 질 때만 해도 그럴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중환배 세계대회 준결승(13일 타이베이)에서 일본의 왕리청(王立誠)9단에게 지고 곧이어 LG배 세계기왕전 준결승(24일 제주도)에서 중국의 위빈(兪斌)9단에게 꺾이자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모두 중요하고 큰 시합이다. 결정적인 판에선 지는 일이 거의 없던 이창호9단이 이런 대국에서 3연패를 당한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더구나 최철한을 제외한 왕리청(47세)과 위빈(38세)은 자기 나라에서도 최정상은 아니며 조금 과장한다면 한물 간 기사들이다.

그런데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최강자 이창호가 이런 기사들에게 연속 지다니!(이창호는 이 대국 전까지 왕리청에게 6전 전승, 위빈에겐 12전 11승을 거두고 있었다)

이창호는 세계 정상에 오른 이후 두번의 짧은 슬럼프(?)가 있었다.1996년 5월 한달 새 조훈현9단에게 비씨카드배 결승전을 포함해 4연패를 당한 일이 있고, 99년 여름 춘란배 결승전 등에서 조훈현.유창혁에게 4연패를 당한 일이 있다. 잠잘 때도 바둑만 생각한다는 이창호가 10대의 나이를 마감하고 20대에 접어들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신기한 점은 그 패배를 놓고 "이창호가 과도한 대국으로 지친 것 같다"는 우려보다는 "이창호도 돌부처가 아니라 역시 인간이었다"며 그의 패배를 환영하는 프로기사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창호는 곧 컨디션을 회복해 연승행진에 나섰고 이를 지켜본 서봉수9단은 "결혼이나 여성문제 같은 바둑판 밖의 세상사만이 이창호를 이길 수 있다. 이창호의 적은 이창호 자신뿐"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그렇다면 30대에 접어들면서 벌어진 이번의 연패를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스승 조훈현9단은 "역전패를 당했다는 것, 내용이 썩 좋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잘 안될 때는 누구한테나 지는 게 바둑이다. 상대들이 강해졌고 강행군의 일정이 몸에 부담이 될 나이도 됐다. 그러나 아직 젊기 때문에 슬럼프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중국의 구리(古力)7단도 "이창호의 역전패는 놀랍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새로운 스타일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인 것 같다. 그렇다고 이창호9단이 흔들리고 있다고 보지 않으며 그는 여전히 일인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차오다위안(曹大元)9단처럼 "위빈과의 바둑을 보면 이창호가 내리막길을 걷는 것으로 보인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이창호의 팬을 자처하는 서봉수9단은 기술적으로 이창호는 여전히 최강자라고 전제한 뒤 지금 상황은 "슬럼프라기보다 권태기에 가깝다"라는 이색 진단을 내리고 있다. 일인자로 더 올라갈 곳이 없는 상태를 오래 지속하다 보면 일시적으로 집중력이나 승부에의 열정이 저하될 수 있다는 얘기다.

박치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