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죄송의 가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꼭 이런 해피엔딩만 있는 건 아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혹은 끝나기도 전에 바로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다. 벌써 몇 번째 같은 말을 하지만 그리 미안해하는 것 같지 않다. 이때의 진정성은 어떻게든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지난주 매체를 통해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죄송합니다”이다. 청문회 덕분이다. 일부 후보는 스무 번 넘게 했다고 한다.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한 것도 아니고, “잘못했다” “죄송하다” “교훈으로 알고 열심히 하겠다”고 반성과 사죄를 하는데 듣는 대다수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진정성이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미안함에는 죄의식과 수치심이 섞여 있다. 죄의식은 외부에서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외적 통제의 존재 의미가 크고, 수치심은 자아가 세워놓은 내적 기준에 적합하지 않을 때 경험한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쪽이 작동하면 미안해하게 된다. 이때 직접 말을 하거나 말없이 표정만 봐도 그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다.

죄송에는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 위에서 얘기한 첫 번째 경우는 대개 반성과 변화가 수반된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에는 사태 모면의 요령만 생긴다. 듣는 사람도 이 아이의 죄송의 가치는 별것 아니라고 여기게 돼 나중에 정말 미안해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자존심이 센 사람일수록 사과를 쉽게 못한다. 본인이 가장 잘난 사람이어야 하는데, 나 말고 더 센 무엇이 외부에서 잘잘못을 가린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고,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내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한 이들이 사과를 하는 것은 쉽게 보기 어렵고, 그들이 하는 사과의 힘은 상대적으로 큰 것 같다.

지난주 우리가 많이 들은 죄송은 어느 쪽에 속할까. 죄송함의 진정성과 가치는 많이 들을수록 떨어진다. 시장 논리가 적용된다. 죄송하다고 말을 하는 것은 권투에서 코치가 링 안으로 수건을 던지는 것 같은 결심이 전제되었으면 한다. 수건을 던지고 나면 잠깐 쉬었다가 다시 싸우는 게 아니라, 패배를 인정하고 이 게임은 끝이 난다. 그 정도 결의가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래야 죄송의 가치가 올라가고, 한 번 들었을 때 그 사람의 미안함의 진정성이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사이에 죄송의 가치가 땅으로 떨어졌다. 이제 누가 내게 잘못을 한 후 찾아와 “죄송합니다”라고 해도 마치 “식사는 하셨어요” 정도로 들릴 것 같아 두렵다.

지금껏 죄송하다는 말로 국민을 즐겁게 한 사람은 얼굴이 못생겨 죄송하다던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뿐인 것 같다. 그만큼 죄송은 막 쓰면 안 되는 귀한 말이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정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