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0>제104화두더지인생...발굴40년:45<끝>.기고를 마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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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971년 나는 고고학 초년병이었다. 71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남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유물(靑銅遺物)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보 제143호인 대곡리 청동유물일괄품(靑銅遺物一括品)은 구재천(具在天·당시 67세)씨가 자신의 집 북쪽 담장 밖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다 우연히 발견했다. 具씨는 무엇인지 몰라 동네 엿장수에게 팔아 넘겼고, 엿장수가 전남도에 신고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광복 후 우리나라 최대의 청동유물 발견이었고 지금까지 기록이 깨지지 않았다.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윤무병 수석학예관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가 조사를 당일 완료하고 돌아와 문화재 지정을 위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유물은 이듬해 3월 국보로 지정됐지만 최초 발견자인 具씨는 법에서 정한 신고기간을 넘겼기 때문에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

지난 6월 말 공직생활을 마감한 나는 처음 3개월은 현직보다 더 바쁘게 보냈다. 10월 들어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노후 설계나 하면서 아내와 함께 여유있게 여행이나 할까 하던 차에 느닷없이 중앙일보의 연재 청탁을 받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2개월 넘게 중앙일보에 보낼 원고와 씨름하다 보니 어떻게 연말이 됐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이렇게 살다가는 백수(白壽)까지 사는 것도 문제 없겠다고 친구와 함께 얼마 전 대포를 한잔하며 농담하기도 했다.

펜을 놓게 되니 솔직히 해방된 심정이기도 하고 조금 허탈하기도 하다. 발굴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나는 고백성사라도 하는 심정으로 솔직하게 지나온 날들을 회고하려고 했다. 후학들이나 고고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언론인·대학교수·공무원·후학들·군 동료들과 일반인 등 전국에서 많은 분이 관심을 보여 주었다. 고고학계 선배들은 가끔 "내 이야기는 언제쯤 나가느냐?"고 물어왔고 "글솜씨가 대단하다. 작가가 돼도 좋겠다"는, 분에 안맞는 칭찬도 들었다. 중학교 교감을 지낸 한 분으로부터는 "매일 기사를 읽고 있다. 좋은 글을 써줘서 고맙다"는 감사말과 함께 부부 동반 저녁을 대접받기도 했다.

초년병 시절의 발굴 얘기를 하자니 당시 발굴들이 얼마나 허점투성이였나 하는 생각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지만 발굴조사는 학문적 목적의 발굴이든, 개발 때문에 하게 된 발굴이든 아무리 최선을 다했더라도 유적 파괴는 불가피하다. 학술적인 발굴 조사는 유적은 남는 것이기 때문에 부분적인 피해만 감수하면 된다. 하지만 각종 건설이나 개발 등의 이유로 발굴조사 후 유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구제발굴은 유물과 기록은 남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땅속의 역사를 지우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장비와 인력을 동원하더라도 유적이 가진 정보를 1백% 밝혀내기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발굴조사는 능사가 아니다. 고고학은 발전 중이고 과학적인 뒷받침도 날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어떻게 후세에 유적을 파괴하지 않고 물려줄 것인지를 항상 고민해야 한다.

연재를 마치는 변(辯)이 조금 무거워진 것 같다. 그동안 내 얘기를 읽어 준 독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못다 밝힌 얘기들은 다음에 기회가 주어지면 마저 털어놓겠다.

정리=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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