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일본:장기침체 속 저공비행 계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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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다라다라'.

일본인들이 일본경제를 한마디로 표현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일본어론 '이렇다 할 변화 없이 지루하게 질질 끄는 모양'을 뜻한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경기침체가 12년에 걸쳐 이어지고 있는데다 앞으로도 나아질 기미가 별로 없다는 얘기다.

일본 정부는 올해 실질 경제성장률을 0.9%로 예상한데 이어 2003년도는 0.6%로 내다봤다. 올해 초 경기가 바닥을 쳤으나 회복세가 기대에 영 못미친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는 신규 국채 발행액을 연간 30조엔 이하로 억제하겠다는 공약마저 번복한 채 경기부양을 위해 추경예산을 편성키로 했다. 그러나 구조개혁이나 부실채권 정리가 늦어지고 있어 이같은 부양책이 얼마나 효험을 낼지는 불투명하다.

◇계속되는 저공비행=일본 경제는 자칫하면 내년 중 국내외에서 더블펀치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미국 경제의 파급효과다. 총리 자문기구인 경제재정자문회의는 내년도 미국 경기가 올해 수준에서 그칠 경우 일본의 성장률을 0.4%포인트 낮추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부실채권 정리가 남아있다. 특히 내년 4월부터는 산업재생기구가 본격 가동돼 부실기업 중 되살아날 수 있는 기업과 퇴출대상 기업을 가려낼 예정이다. 일본의 관행상 한국처럼 대담한 부실기업 정리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흉내만 내더라도 -0.4%의 역성장 효과가 나올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런 펀치를 모두 맞을 경우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5조엔(1.1%) 이상 감소할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정부는 추경예산·감세 등으로 이에 맞설 계획이다.

그러나 설비투자와 개인소비가 늘지 않는 한 일본 경제는 추락을 겨우 모면한 상태에서 저공비행을 계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부실채권 정리가 관건=지난 3월 말을 기준으로 일본의 금융회사들이 가진 부실채권은 52조4천억엔에 달한다. 이 가운데 일본 정부가 12월부터 '금융재생 프로그램'을 발동해 처리하려고 하는 부실채권은 주로 대기업의 부실채권 28조4천억엔이다.

비율로는 54%가 넘어 대단한 목표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별 게 아니다. 노무라(野村)종합연구소에 따르면 현금수지의 10배가 넘는 빚을 진 기업들의 부채 총액은 2백98조2천억엔이다. 아직은 부실채권으로 잡히지 않았지만 언제 표면화할지 모르는 거대한 부실의 시한폭탄이다. 부실채권을 목표대로 정리해도 잠재 부실총액의 10%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일본 정부도 이를 알고는 있지만 경기에 미치는 충격을 고려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금융청을 통해 은행의 부실채권 정리를 재촉하고 있는 정도다.

특히 기업 부실은 정치적으로도 민감해 통치권 차원의 중대결단이 필요한 사안이다.

◇엔저로 돌파구 찾나=일본 정부는 마지막 수단으로 엔저(低)카드를 꺼내들 작정이다. 일본이 국제적인 마찰을 각오하고라도 엔저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것은 내년도의 수출전망이 흐리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올해는 연초의 엔저 덕으로 수출이 지난해보다 7.9%나 늘지만 내년엔 수출증가율이 1.8%로 주저앉는다는 것이다. 수출기업의 실적이 나빠져 실업률도 올해(평균 5.4%)보다 높은 5.6%로 예상됐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미국이 경기회복을 위해 달러 약세(엔고)를 유도하려는데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미 시오카와 마사주로(鹽川正十郞) 일본 재무상은 "구매력 평가 차원에서 엔화 가치는 달러당 1백50엔으로 시산되고 있는데도 최근의 환율은 1백20엔대에서 움직이고 있다"며 "과도한 엔고를 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yhnam@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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