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조와 정조의 탕평책: 원칙·실력 중심의 사회통합 꿈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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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시대는 항상 변화와 정체의 갈림길에 처하게 마련이다. 현명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데 조선의 영·정조와 광해군 때만큼 그 상황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없다. '역사에서 오늘을 배운다'는 제목으로 두 차례에 걸쳐 그 시대적 현실을 조명한다. 역사와의 대화를 통해 한반도가 국내외적으로 처한 오늘을 새롭게 조명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시도다.

편집자

영조와 정조는 18세기 개혁 군주로서, 이후 조선 나름의 개혁정치 모델을 제시했다고 인정받는 통치자다. 개혁의 총론은 '탕평(蕩平)'이라는 정치 담론으로 제시했지만, 각론은 실제 국가 사업 추진을 통한 사회·경제 개혁에까지 이르렀다. 즉 체계를 갖춘 개혁 프로그램, 완급을 조절하는 실천이 있었다.

오늘날도 강한 개혁 드라이브가 걸리는 시기에는 탕평 국면 조성, 탕평책 실시라는 요청이 나타난다. 이런 탕평 정치는 '세상을 크게 고르게 하는'정치, '크게 하나되게 하는' 정치, '지극히 정직하고 올바르게 하는' 정치라는 전통적 의미도 담고 있다.

정조 임금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오늘날 실제 사실을 들어 나라 일을 살펴보면 새롭게 바꾸는 것이 옳은가 그대로 두는 것이 옳은가.… 좋은 옛날의 이상적인 제도는 비록 일시에 회복하기 어렵겠지만 약간 평안한 정도의 정치 조차도 기약할 수 없지 않은가." 곧 '큰 병을 앓는 사람의 원기가 비어버린 상태', 그대로 둘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현실 판단은 다음 세가지 시대적 과제에 바탕하고 있다. 첫째, 학벌·가문·지역이 얽힌 당파 대립이 전국을 싸움터로 만들었다. 군주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임년 옥사 이래… 시골까지 하나의 전쟁터"였고 "인심이 무너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곧 붕당 정치의 장을 바꾸어야 했다.

둘째, 집약농업과 유통경제의 발달로 중간계층이 성장했다. 전문 기술자인 중인층뿐 아니라 신 중간계층 및 농촌 지식인들의 신분 상승운동이 나타났다.

셋째, 양반층의 급증과 평민층 및 천민층의 감소라는 신분사회 붕괴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평민층이 양반층 생활방식을 일정 부분 공유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국가는 변화를 수렴해 일반 백성에 대한 파악 방식을 바꾸어야 했다.

넷째,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중국통치가 안정기에 들어갔다. 청 문화의 황금기가 도래했고, 일본도 직접 청과 교역하는 등 국제 외교와 무역의 변화에 대한 새로운 대처가 필요했다. 특히 1728년에 일어난 전국적 반란인 '무신란'은, 이런 변화 상황을 당파 대립이라는 정치상황 속에 방치해 둘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잘 보여주었다.

'탕평'으로 상징되는 영·정조 연간의 개혁은 정치 개혁에서부터 시작됐다. 영조와 정조는 즉위 후 정치 주도세력을 바꾸어 버렸다. 영조는 개혁 주도세력으로서 이른바 탕평당을, 정조는 영조 말년 탕평당이 변질된 외척당에 대항했던 정파, 노론·소론·남인 중에 깨끗함을 지킨 정파(이른바 청류당)를 선택했다.

영조는 다양한 실제 사업 추진을 통해 탕평파를 결집시켜 나가는 방식을 취했다. 영조 연간의 개혁은 '백성은 군주인 북극성 주위를 도는 뭇별'로 상징되는 군주권, 알맞게 배분함을 강조하는 온건파 정치집단의 주도,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의 조직 개편이라는 개혁틀이었다. 곧 사람 쓰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반면에 정조는 각 정파에서 실력을 갖춘 깨끗한 지도자를 함께 써서 탕평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을 택했다. '백성은 군주와 한 핏줄'로 상징되는 군주권, 정치 원칙을 강조하는 강경파 정치집단의 주도, 학문정치를 강화하는 방향의 조직 개편이라는 개혁틀이었다. 곧 '인물 중심'탕평에서 '정치원칙 중심'탕평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당연히 영조와 정조는 성장하는 백성을 정치의 중요 변수로 인정하고, 일반민의 뜻을 적극 수렴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백성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은 군주 행차 때 받는 상언(上言:백성들이 직접 전하는 소장)·격쟁(擊錚:꽹과리를 두드리며 말로써 뜻을 전하는 것)제도 활성화, 군주 측근의 비밀 감찰사인 암행어사 제도 활성화 등을 통한 백성의 걱정거리 처리로 나타났다. 기득권 세력의 견제 장치인 동시에 탕평 기반의 사회 확산 노력이었다.

이러한 탕평으로 표현되는 개혁은 대체로 다음 목표를 달성하려 한 것이었다. 첫째, 정치 이념에 대한 시비 논쟁 종식이다. 사람을 죽이려는 살육전에다 정치 원칙을 갖다 붙이는 언론행위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재생산하는 핵심 세력을 퇴장시켰다. 이는 "지금 당파 사이에는 서로 죽이고자 하는 마음은 없어졌다. 시기심이 문제일 뿐이다"라는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둘째, 사대부 사이의 관직 배분 균형, 곧 문벌과 지역 간의 이해 관계 재조정이다. 영조는 주로 특채 방식을 써서 당시 불이익을 받던 남인과 북인 중에서 재상급 인재를 키우려 했다. 반면에 정조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계 인재들은 학문 실력 때문에 모두 군주의 각별한 배려를 받았다고 기록해놓을 정도의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셋째, 정치 원칙의 절충 및 새로운 창조이다. 이는 탕평 방식의 단계적 전환, 본질주의적 통치론 사용, 학문실력 중심 정치 표방 등으로 추진됐다. 특히 정조는 강경파 지도자를 함께 재상으로 쓰는 이른바 이열치열의 통치술을 사용했다. 이들은 대체로 규장각 정비, 장용영 강화, 화성 축성 등에서 함께 일하는 기회가 제공됐다.

이러한 탕평의 목표 달성을 위해 영조와 정조는 '스승이면서 통치자'라는 이미지 메이킹을 사용했다. 이러저러한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으나 특히 정조는 '원칙과 실력'이 동시에 존중된다는 전통시대 문민통치의 이미지를 잘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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