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實勢 사슬' 끊고 장관과 한몸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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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국정운영 파트너는 장관들이다.

그러나 과거 정권에서 장관을 지낸 인사들의 경험은 그렇지 못하다.

최선정(崔善政)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0년 의료대란 사태 수습을 위해 장관에 임명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청와대 측에 "제발 개입을 하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해야 했다. 이익단체 대표들이 너도나도 청와대와 '실세'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려 했고, 그 때문에 정작 협상을 진행해야 할 보건복지부는 공중에 떠버렸기 때문이다.

"가신이나 실세가 장관에게 압력을 가해 특정 정책을 밀어붙이도록 하고는 문제가 생기면 자신은 슬쩍 빠져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 崔전장관의 얘기다.

한국의 장관들은 사정·정보기관원들의 눈치도 안 볼 수 없다. 대통령이 사정·정보기관의 보고를 따로 받아보며 장관의 능력과 자질을 끊임없이 가늠하는 풍토가 계속되는 한 어쩔 수가 없다.

"특히 실세나 가신들의 인사 청탁을 안 들어주면 청와대로 장관에 대한 음해성 정보가 쏟아져 올라간다."

한 전직 장관의 하소연이다.

"언제 목이 날아갈지 알 수가 없으니 취임한 지 3개월만 지나면 실세들의 동향을 살피고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들은 물론, 부처에 출입하는 사정·정보기관 하급직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장관들의 현실이다."

새 정부에서는 과거와 같은 사조직·비선·가신·측근·정보보고의 싹을 처음부터 잘라내야만 한다는 소리는 그래서 나온다.

그런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라는 노무현(盧武鉉) 당선자 주변에서도 벌써 '누구는 당선자의 정치적 사부'이며 '또 다른 누구는 당선자로부터 상당한 권력을 넘겨 받을 것'이라는 말들이 돈다. 또 '좌 아무개, 우 아무개'라며 386세대 젊은 측근들의 이름도 오르내린다. 盧당선자는 측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주변의 인적 네트워크가 약하다는 평을 듣는 盧당선자는, 그럴수록 사적 네트워크에 기대지 말고 공적인 인력 네트워크를 최대한 동원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주문도 동시에 나온다.

손학규(孫鶴圭) 경기도지사는 대통령이 실세나 청와대비서실을 거치지 않고 장관들과 중요한 정책에 대해 직접 토론을 하는 분위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대통령이 정보기관의 보고나 실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장관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독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토론의 문화가 없다. 국무회의에서도 장관들은 입을 다물고 대통령 혼자서 일방적으로 얘기한다. 그런 걸 개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른 전직 장관은 "장관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거는 것조차 불경(不敬)스럽게 취급되는 봉건주의적 관행도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장관이 아무리 대통령에게 직접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청와대 수석이나 비서실장을 거치지 않고서는 전화조차 걸 수 없는 것이 관례라는 것이다.

'힘이 실린 장관'은 대통령 본인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대통령이 모든 걸 다 하려하면 장관이 할 일이 없어지고 문제가 생기면 '나는 책임이 없다'고 억울해한다. 장관이 힘이 없으니 화살이 직접 대통령에게 가는 것이다."(이명식 민주당 지구당위원장)

미국 레이건 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에드윈 미스도 같은 얘기를 했다.

"행정부 각료들이 소외감을 느끼면 문제가 발생한다. 대통령 참모진이 각료의 역할을 하게 하면 안된다. 대통령이 각료들을 빈번히 만나야만 한다."

강경식 전 부총리는 '청와대 풍토병'을 거론한다.

"일단 대통령이 되고 나면 예외 없이 걸리는 병이 있다. 정보와 권한의 우위를 능력의 우위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풍토병을 고치지 못하는 한 장관들을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활용할 수 없다."

익명을 요구한 현 정부의 한 장관급 공직자는 청와대비서실의 기능과 관련해 구체적인 주문을 했다.

"盧당선자가 청와대비서실을 강화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아는데, 자칫하면 정부 부처가 비서실 눈치만 살피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대통령이 비서실보다는 장관들과 직접 논의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만 정책의 내실화가 가능하다."

<특별취재팀>

김수길 부국장,이하경·김종혁·송상훈 정치부 차장,이세정·고현곤 경제부 차장,이영종 통일외교팀 기자

sg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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