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10년 아성 흔들 춘추전국시대 새판 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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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세계바둑의 일인자냐"고 물으면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고수들은 누구나 "이창호"라고 대답했다.지난 10년간 '이창호'란 이름은 세계바둑계의 우상이자 거대한 벽이었다. 이창호9단의 기보는 바둑으로 성공하려는 동양의 소년들에게 교본이 됐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던가.지난해만 해도 '상금 10억원 돌파'에 '1백타이틀 획득'등 화려한 전적으로 만장일치 MVP에 오른 이창호(27) 9단이 올해 처음 퇴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바둑계가 이창호 일인천하에서 벗어나 군웅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의 양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2002년 바둑계의 가장 중대한 변화다.

한국바둑은 올해 세계대회서 17연속 우승을 이어가며 여전히 세계 최강의 힘을 보여줬다.

그러나 한국바둑의 핵심 전력이라 할 이창호9단은 메이저 세계대회서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대신 신예강자 이세돌(19) 3단이 불길처럼 일어나 국내외에서 정복지를 넓혔다. 이세돌은 후지쓰배에서 생애 최초로 세계대회 우승컵을 쟁취했다. 국내대회에서 LG정유배와 KTF배를 장악했고 두개의 신예대회서도 우승했다.

칭기즈칸처럼 일어선 이세돌의 반대편에선 노장 조훈현(49) 9단이 뜨거운 활약을 보였다. 그는 KT배에서 우승했고 삼성화재배 세계대회 결승에 올랐으며 박카스배 결승에서 송태곤3단과 접전을 벌이는 등 이 시간에도 도처에서 신예강자들과 싸우고 있다. 그는 황혼이 서산을 붉게 물들이듯 전 기전에서 활약하며 현재 조한승5단과 연도 '최다승'을 다투고있다.

유창혁(36) 9단은 신흥세력인 이세돌과의 접전(후지쓰배·KTF배)에서 아슬아슬하게 역전당하는 바람에 지난해보다 영토를 약간 잃었으나 여전히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우승하는 등 한 지역의 맹주로서 입지를 지켰다.

박영훈(17) 3단이 박카스배에서 우승하며 군웅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지난 연말의 일이다. 그 박영훈의 뒤를 이어 올해도 송태곤(16) 3단과 조한승(20) 5단등 강력한 신예들이 정상권과 치열한 접전을 펼치며 새로운 맹주로서의 힘을 키워나갔다.

이창호9단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을까. 그는 국내기전에서 수많은 도전자들을 차례로 꺾었다. 목진석6단(기성전)·조훈현9단(국수전)·안조영7단(명인전·패왕전)·이상훈7단(바둑왕전)을 물리쳤고 이세돌3단을 왕위전에서 3대2 박빙의 스코어로 꺾어 그의 거침없는 진격에 제동을 걸었다. 여전히 이창호는 강했다.

그러나 이9단은 올해 침묵하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세계대회에서 TV아시아선수권을 제외하고는 우승컵을 따내지 못한 탓이었다. 중국의 신예들에게 곧잘 진 것이 국제대회의 부진으로 이어졌는데 이바람에 외국의 프로들은 오랜 세월 그들을 괴롭혔던 '이창호 공포증'에서 벗어나는 징후를 보였다.

이제 국내 바둑계는 이창호·조훈현·유창혁·이세돌의 4강과 제5세력인 신예군으로 분할 점거됐고 이같은 군웅할거의 판도는 세계 바둑의 판도마저 바꾸어 놓을 전망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dar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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