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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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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결승전에서 신학리가 와우리를 이겼단다.” 광복절 오후, 어머니는 찬조금이 헛돈이 아니었다고 승전보를 전해왔다. 동네의 승리보다 와우리란 동네 이름에 웃음이 퍼졌다. 우리 동네처럼 큰 동네여서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부러운 것은 개회식 때 선수의 선두에서 장구 치며 입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면민들은 누구나 ‘와우리 장구쟁이’라 불렀는데, 면장이나 조합장보다 더 유명했다.

10년 전, 숨어있는 춤을 찾아 떠돌 때 그 분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예기(藝妓)들의 ‘살풀이춤’과 한량들의 ‘입춤’ 등을 탐문했는데, 또 하나의 관심사가 ‘장구춤’이었다. 그러나 명인 김오채가 작고한 후였다. 수소문 끝에 후계자 김동언(金東彦·1940년생)이 담양군 봉산면 와우리에 산다는 말을 들었다. 분명 그분인데, 만나자니 걱정이 앞섰다. 혹시 ‘또랑광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또랑(도랑)’을 경계로 한 작은 마을에서나 행세하는 광대란 말인데, 만약 그렇다면 어릴 적 춤의 환상이 여지없이 깨지는 거였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찾아 한 가락 부탁했을 때, 그분의 장구에서 날벼락 치는 가락이 쏟아졌다. 김오채 명인처럼 “장판방에 콩 쏟아지듯” 좌르르 흐르는 물샐 틈 없는 가락이었다. 그리고 “궁따쿵!”을 연달아 빠르게 몰아쳤다. 어린 날 들었던 토란 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후드득 가락’이었다. 신열에 들떠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는데, 선생은 인근의 지명을 다 꿰는 나를 궁금해했다. “예전 봉산초등학교에서 이대항 축구대회 할 때 뵈었습니다”고 말했다.

‘이대항 축구대회’, 초기엔 짚으로 새끼를 꼬아 돌돌 만 공을 짚신 신고 찼다 한다. 짚으로 거대한 줄을 만들어 ‘줄 당기기’를 하던 면민의 열정이 공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 황토 그라운드에서 선생은 홀로 장구를 쳤다. 마을에서 사라진 ‘지신밟기’의 풍물을 독자적으로 감당한 것이다. 분명 ‘단독 드리블’만큼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어느덧 춤이 되어갔다. 애써 궁리해 만든 몸짓이 아니었다. 덩덩! 스스로 울려낸 소리에 훌쩍 뛰어드니 저절로 춤이 되었다. 어린 시절, 침에서 춤이 나는 그 신통한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그 춤이 심금에서 내내 꼼지락거렸던지, 지금껏 춤에 푹 빠져 산다.

어머니가 내 이름으로 찬조를 했는지 친구들에게 문자와 전화가 왔다. 공만 보면 뛰어나간 녀석들, 아직도 공을 쫓아 펄펄 뛰는 모양이었다. 담양의 대밭에서 함께 컸으니 진정한 죽마고우(竹馬故友)인데, ‘이대항 축구대회’에서 녀석들은 축구공을 봤고, 난 장구춤을 본 것이다. 갑자기 내년 대회에 김동언 선생을 출연시키자는 제안을 하고 싶어졌다. 성사된다면 녀석들과 나는 운동장에서 35년 만에 공과 춤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진옥섭 KOUS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