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상호 보도 "감정 앞선 편향보도 많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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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지리적으로는 물론이고 문화·경제·역사적으로 같은 권역에 속하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아주 멀게 느껴지는 사이가 양국 관계다.

지난 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는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연구소 주최로 '한·일 방송뉴스의 상호보도 비교분석'이라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양국의 언론 종사자와 학자가 참여한 이날 대회에서는 주로 KBS와 NHK의 방송 내용을 비교·분석해 21세기를 맞아 한·일 관계를 전향적으로 재정립하는 데 방송이 어떻게 기여할지를 논의했다.

이날 '한·일 양국 텔레비전 뉴스언어의 문제:그 신화와 현실 간의 거리'라는 주제로 발표를 한 김정기 교수(한국외대)는 한국 언론은 일본에 대해 '문화적 스승론'의 신화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문화적 스승론이란 과거 한반도로부터 많은 문화가 건너감으로써 야만적이었던 왜국(일본)을 가르쳤다는 발상을 말한다.

김교수는 문화적 스승론은 현대 일본을 문화적으로 거의 공백 상태인 것처럼 다루거나 왜색문화로서 폄훼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일본과 일본인을 낮춰 보게 된다. 그는 1993∼97년에 KBS가 보도한 대일(對日)뉴스 9백98건 중 14.1%인 1백41건이 경멸적 표현을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 예로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키로 한 뒤 나간 KBS의 95년 8월 4일자 보도를 들었다.

"(앵커)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자신들의 조선 지배가 영원하길 비는 뜻의 주술적인 문양을 건물 곳곳에 새겨 놓았습니다. 이 꽃문양은 일제가 패망한 뒤 50년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채 교묘히 숨겨져 있었습니다. (기자)건물 안쪽의 모든 기둥도 마찬가지고 천장과 홀 바닥·문살 등 사람들 눈에 잘 뛰지 않은 곳마다 교묘히 숨어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안팎 곳곳에 일제의 상징인 태양을 뜻하는 이 주술적 연꽃 문양을 교묘히 안배해 놓은 것입니다."

당연히 제기할 수 있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교묘하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일본을 지나치게 경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김교수는 NHK의 대한(對韓)보도의 경우 노골적으로 일제 식민통치를 찬양한다든가 군국주의를 칭송하지는 않지만 일본 정치인의 망언에 대해서는 KBS와 비교해 축소 보도하거나 침묵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침묵이야말로 일본 보수 엘리트층이 기대고 있는 한국에 대한 신화, 즉 식민 통치 시절의 향수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친다는 것.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구 총독부 건물 철거 전후인 94∼95년이었다. 93∼97년 중 KBS의 망언보도는 38건이었는데 94∼95년에만 36건에 달했다. NHK도 이 기간에 총 17건의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 식민지 통치의 상징인 구 총독부 건물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무의식적으로 반감을 표출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김교수는 NHK가 일본 사회 일각에 흐르는 신화를 대변한 예로 95년 8월 15일 보도를 들었다.

"(앵커)전후 50년을 맞이한 오늘, 서울에서는 기념식과 함께 구 총독부 건물의 해체작업이 시작됐습니다.(서울시민)일본이 우리에게 준 고통을 생각하면 해체는 당연하다. 기분이 좋습니다.(서울시민)일본이 만든 것은 모두 파괴해야 한다."

서울 시민의 입을 빌려 일본이 만든 것은 모두 파괴해야 한다는 말을 유도했고, 역시 서울시민의 입을 통해 '파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철거나 해체라는 온건한 표현보다 일본인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파괴'라는 말을 끌어냈다는 주장이다.

김교수는 "저널리스트가 사용하는 뉴스 언어는 해당 사회의 가치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면서 "언론은 역사인식과 예리한 실존 의식을 통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언어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토론에서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언론이 일본은 가해자, 한국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태도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성을 높여 가고 있다는 주장이 많았다.

이영기 기자

ley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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