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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렬 목사의 ‘치고 빠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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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08년 9월 10일. 불법 촛불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한상렬 목사가 법정에서 한 진술이다. 한 목사는 당시 재판에서 “내가 총 지도부인 양 기소했는데 근거가 어디 있느냐”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촛불 문화제에 참여했을 뿐 불법 시위를 주도한 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검찰과 경찰이 파악하는 사실은 전혀 달랐다. 검·경은 초기에 평화적이었던 촛불집회가 폭력 시위로 변질한 배후엔 한 목사가 공동대표인 한국진보연대가 있다고 봤다. 광우병대책회의의 상근 실무진 중 절반 정도가 진보연대 인사들이었다. ‘청와대 진격투쟁’을 선동해 도로점거 불법 시위를 이끈 것도 진보연대 소속 단체들이었다. 그러나 한 목사를 비롯한 진보연대 공동대표들은 시위가 폭력 양상을 띠자 현장에서 대부분 모습을 감췄다.

촛불시위 때만 그런 게 아니다. 한 목사는 2005년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범국민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범대위는 당시 각목·쇠파이프가 난무하는 폭력 시위를 주도했다. 하지만 폭력이 벌어지는 현장에선 범대위 대표들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한 목사는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 때도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불법 시위에 앞장섰다. 일부 시위대는 미국 대사관에 돌멩이 수십 개를 던졌다. 그러나 한 목사는 금지 통보된 집회를 연 죄와 교통방해죄만 적용돼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폭력시위를 주도한 증거가 없었다. 이처럼 검찰이 불법시위를 이끈 이들에게 폭력행위에 대한 책임을 직접 묻기가 쉽지 않다. 이들은 현안이 생기면 4~5명이 공동대표로 시위를 주도한 뒤 공권력과 맞붙는 시점에선 뒤로 빠진다. 지도부가 폭력에 직접 개입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 이들은 법원에서 대개 집행유예를 받는다.

검찰 공안부의 한 검사는 “폭력시위를 단골로 주도하는 ‘몸통’이 있다. 이들은 시위를 기획한 뒤 폭력 현장에선 사라지는 ‘치고 빠지기’ 전략을 사용해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 목사는 지금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에 가 있다. 그는 방북 기간 내내 “천안함 희생자들의 살인 원흉은 이명박”이라는 등의 궤변을 쏟아냈다. 북한 핵무기엔 침묵하면서 전북 부안의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설치엔 극렬하게 반대했던 그의 행적을 볼 때 충분히 예상됐던 행동이다. 20일 한 목사가 한국에 돌아오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밀입북했던 문익환·서경원·임수경·황석영씨처럼 중형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그동안 세상이 변해 국가보안사범에 대한 법원의 판결도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형을 받고 풀려나면 한 목사의 반체제 행각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명실상부한 좌파 운동권의 원로로 하얀 수염을 날리며 시위 현장을 주도할 것이다. 그 특유의 ‘치고 빠지기’ 전술을 구사하면서 말이다.

정철근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