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자원 개발 힘쓴 광업계 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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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89세를 일기로 2일 타계한 장병희(張炳希) 영풍그룹 명예회장은 검약과 근면으로 ㈜영풍·영풍산업·고려아연 등 24개 기업군을 일궈낸 창업주다.

30여년간 고인과 함께 일했다는 원유덕 고문은 "영풍은 1950∼60년대 수출기업으로 1∼2위를 다툴 만큼 사세가 컸지만 張명예회장은 매우 검소했다. 점심은 곰탕·설렁탕·냉면이, 술은 선술집의 소주가 전부였다"고 회고했다.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의 빈소는 재계 35위 기업군의 옛 주인에 걸맞지 않게 조촐했다. 영풍의 한 관계자는 "고인은 창업주이면서도 회사장을 마다하고 가족장(3일장)으로 장례를 치러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張명예회장은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는 등 자신을 내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6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1백만달러 이상의 수출고를 올린 기업인 12명을 청와대로 초청, 만찬을 베풀었을 때 이름이 오른 것을 빼곤 그와 관련된 기사 자료는 거의 없다. 元고문은 "張명예회장은 무역협회 부회장과 해태수출조합 이사장을 지냈지만 대외활동에는 관심이 없었고 실속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지하자원 개발에 평생을 바쳤던 張명예회장은 금광인 무극광산(98년 폐광)·온산제련소를 일군 광업계의 대부로 통한다. 고려아연은 외환위기 때 모은 금을 금괴로 만든 기업이다.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사리원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월남한 張명예회장은 49년 고(故) 최기호 회장과 함께 수산물 수출회사인 영풍기업사를 설립했다.

이를 모태로 영풍은 국내 최대의 연아연 광산과 제련소를 거느린 지하자원 개발 전문업체로 컸다. 고인은 5년전까지만 해도 광산 밑에 내려가 광부들과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엔 영풍문화재단에서 장학사업과 불우이웃에 책 보내기 운동 등을 벌였다. 영풍이 첫 터를 잡았던 서린동 일대의 재개발로 새 사옥이 지어지자 張명예회장은 빌딩 지하 전체를 대형 서점(영풍문고)으로 꾸몄다.

그는 "사옥 지하를 돈벌이에 동원하지 말고 제대로 된 문화공간으로 만들자"며 밀어붙였다고 주변 사람들은 회고했다.

양선희 기자

su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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