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이란 '이라크戰 협력' 비밀 접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20여년 이상 외교관계를 끊어왔던 미국과 이란이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비밀리에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파리의 외교 소식통들이 전했다.

외교 소식통은 "현재 미국과 이란 관리들이 프랑스 파리를 비롯한 몇몇 중립 지대에서 회담을 갖고 공동 이익을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고 확인했다. 미국과 이란은 비밀 접촉을 통해 ▶미군의 이란 영공 사용 허용 ▶이란 내 이라크 시아파 반체제 세력에 대한 공동 대응 등 다양한 세부 작전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은 또 유엔 무기사찰단의 조사에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라크의 화학물질 비축 현황 ▶핵개발 프로그램과 무기조달체계 등 '유용하고 흥미로운' 정보도 공유키로 했다고 소식통은 덧붙였다.

이란 전문가인 파리 8대학의 아자데흐 키안-티에바우트 교수는 "9·11 테러로 중동의 평형 상태가 깨졌으며 이란과 미국의 이해가 중동으로 모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하고 "이라크 전쟁은 미-이란 간 화해를 가속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란은 미국과의 접촉 사실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이란 정부 대변인은 "우리는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어떤 종류의 대화도 미국과 나눈 적이 없다"고 못박고 "우리와 미국의 접촉을 다룬 어떤 뉴스도 우리는 부인한다"고 발표했다. 중동 전문가들은 이란의 이런 논평을 '정치적 제스처'로 해석하고 있다. 20여년에 걸친 이슬람 원리주의 통치를 경험한 이란은 이제 국익을 추구하고 있으며 중동지역에서 위상을 높이기 위해 최소한 미국 측의 '묵인'이라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란과 미국 간 접촉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근거를 내세웠다.

한 중동 문제 전문가는 최근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갈등을 지적하면서 "이란은 걸프지역 안보를 결정하는 데 있어 미국의 새로운 동반자가 되길 원한다"는 주장까지 개진했다. 중동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이란과 이라크의 오랜 적대 관계도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미국과 이란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요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1980년 이란을 침공해 8년 전쟁 동안 수십만의 이란인을 희생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cielbleu@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