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분배 함께 가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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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의 맞상대로 등장하면서 대선 구도를 진보와 보수의 이념 대결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 이념 성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복지나 재분배 정책이다. 양측 모두 당장은 표를 모으기 위해 침 발린 공약을 내세울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보수 진영은 과도한 복지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일 것이고 서민을 표밭으로 인식하는 진영은 재분배 정책에 많은 관심을 쏟게 될 것이다. 결국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식의 해묵은 대립 구도로 논쟁이 진화될 공산이 크고, 공약 공방도 누진과세에 대한 견해를 묻거나 큰 정부의 해악을 따지는 등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전개되기 쉽다.

그러나 복지를 흑백논리식 이념 구도로만 이해하는 것은 정부 재정의 현실과 논리를 모르는 사람들의 우격다짐에 불과하다. 결론부터 말해 우리 현실에서는 이념 성향과 무관하게, 경제논리에만 근거해 분배정책을 펼 여지가 적지 않다. 사실 분배 정의라는 것은 주관적이고 당위적인 개념이므로 시공을 초월하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선성장·후분배의 과거형 논리에 얽매일 필요도, 복지제도가 안착된 서구 국가들의 정책을 답습할 이유도 없다. 핵심적인 문제는 지금 우리의 분배상태나 복지 수준을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이 받아들이는가 여부다.

소득분배의 지나친 악화로 계층 간의 갈등이 심화돼 사회 안정이 흔들리면 정치적 고려에 의한 근시안적인 복지 혜택이 남발되기 쉽고, 이는 재정의 안정과 자원배분의 효율을 해쳐 지속적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 유능한 정부라면 장기적인 안목에서 사회안정에 필요한 분배 수준을 예측하고 너무 늦기 전에 이를 달성할 복지정책을 펼 것이다. 또한 적절한 재분배는 저소득층 자녀들의 인적 자본 증가를 돕고 민간 경제주체의 생산적인 모험에 대한 사회보험을 제공해 성장 잠재력을 향상시킬 수도 있다.

요컨대 재분배 목적의 정책수단은 이것이 장기적인 경제적 합리성에 근거한 능동적 선택인지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타산의 수동적 산물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경우 경제위기 이후 소득분배가 악화된 상태이고 과거와 같은 고성장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계층이나 집단 간의 갈등이 커질 것이고, 자연 정치논리에 의해 재정수단이 채택될 가능성이 늘 것이다. 나아가 공적자금의 부담과 연금재정의 부실로 인해 이미 재정의 건전성이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복지를 무시하자니 사회갈등의 심화에 따른 성장 저해가 걱정되고, 복지를 생각하자니 재정 악화에 따른 악영향을 우려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이런 실정에서 진보건 보수건 이념이나 내세우며 종래의 정책을 우긴다면 실망스러운 결과만 초래할 것이다.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이루려면 지금의 우리 실정에 적합한 창의적인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재정 문제는 물론이고 자본이동과 조세경쟁에 따른 세수감소까지 고려해 정부의 재원은 아끼고 시장의 힘은 빌리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같은 액수의 자금이라도 가급적 효율과 형평을 함께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써야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조세정책은 일차적으로 세수확보에 치중해야 한다. 조세를 통한 재분배는 효과가 제한적인 누진세 체계보다 조세부담의 수평적 형평성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상대적으로 약화된 조세의 재분배 기능은 지출 측면에서 보강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각종 사회보험제도의 합리적 정착을 의미한다. 그만큼 재원이 필요할 것이고 이를 위한 세제개혁이 불가피할 것이다.

또한 사회복지는 곧 정부의 몫이라는 사고를 버리고 시장원리에 의해 사회적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여지를 함께 찾는 것이 현명하다. 나아가 한번 악화된 분배는 사후적으로 되돌리기 힘들다는 점을 인식해 사전적으로 소득분배가 향상될 수 있도록 노동정책이나 교육정책의 틀을 짜야 할 것이다.

경제에 공짜 점심이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이 효율적일 때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 포수가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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