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전도사' 자임 미술사학자 오주석 씨]"우리 문화 살리려면 알고 즐겨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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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문화, 그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그리고 우리가 우리인 까닭, 바로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는 빼어난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문화인·예술가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한 나라의 문화수준이란 결국 그것의 터전을 낳고 함께 즐기는 전체 국민의 눈높이 만큼만 올라설 수 있습니다."

미술사학자 오주석(46)씨는 우리 옛그림에 드러난 조상들의 문화를 통해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을 세우려 오늘도 바쁘다. 기자와 만난 며칠 전에도 경기도 용인에 있는 경찰대학 연수원에서 일선 경찰서장 등을 상대로 함께 옛그림을 감상하며 우리 문화의 자긍심을 키워줬다.

오씨는 강연을 들은 경찰들에게서 높은 안목의 문화적 치안, 사람 사는 정이 통하는 업무를 다짐하는 마음자세를 보았다고 한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동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한 오씨는 호암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2년간 큐레이터로 근무했다. 그만한 경력이면 대학교수 자리도 노릴 만한데 미련을 버리고 95년부터 교원·공무원·회사원 및 일반인을 상대로 대중 강연을 주업무로 삼고 있다. 미술사학계의 딱딱한 논문보다는 그림을 통해 조상들과 숨결을 같이 나누며 그들의 높은 문화를 일반에 전해 우리 문화의 눈높이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20세기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생존의 연대였습니다. 국권 침탈과 식민지배에 이은 동족상잔의 전쟁, 가난과 독재로 얼룩진 지난 20세기 우리는 우선 먹고, 살아 남기 위해 문화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난했던 경제나 부조리한 정치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기에 문화에 대한 관심과 욕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역동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이 때 지식인·문화인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문화 중에서도 우리의 것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게 오씨의 지적이다. 식민시대 우리의 것을 연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독립운동과 같이 위안이 됐고 훌륭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서구적인 방법을 동원해 우리 문화의 기둥을 세우고 뼈대를 잡아나가는 과정이었다. 지금은 원사료를 꼼꼼히 뒤져 기초부터 세밀하게 해나가 우리 것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지금의 우리의 삶과 우리 문화를 접목해 나가야 할 때라고 오씨는 말한다.

우리의 것들이 전수는 되고 있으나 음악은 음악인들만이 감상하고 무용은 무용인들만이 보는 것으로 됐다. 이것마저 인간문화재와 같이 독자적으로 생존하지 못하고 당국의 지원 같은 버팀목에 기대 겨우 생존해가는 노거수(老巨樹) 같은 꼴이 됐다.

지금 전통공연을 보면서 동화돼 '얼씨구, 얼쑤'하며 추임새를 넣고 흥이나 덩실덩실 춤사위를 넣을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이러한 때, 소위 문화의 세기라는 21세기 우리의 것을 생활 속에 살려놓지 않으면 우린 또 문화 속국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오씨는 일반에 우리 문화를 알리느라 오늘도 바쁘다.

"기와 음양오행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사유체계가 우리 문화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전통 미술사학은 그런 맥락에서 우리 그림 저변의 철학과 역사, 미적 표현과 당대의 삶 등을 더듬어가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강단이나 학계는 서구의 양식사만 답습하는 관행에 젖어 이런 논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국수주의라 몰며 '재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통문화 토양에서 나온 우리의 문화는 마땅히 그 토양에서 바라보아야 삶과 문화가 유리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우리 선조들의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에, 또 너무 많이 파괴되고 소실되어 얼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 유산은 일단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그런 애정을 가지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스스로 그 속내를 도란도란 들려준다는 게 오씨의 우리문화 감상법이다.

이런 자세로 우리 미술을 일반에 알리고 2000년에는 단행본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펴내 인문서로는 보기 드물게 베스트셀러로 만들기도 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 등의 그림을 감상하며 당대의 역사와 삶, 인간관계, 사상과 감정 등을 펼쳐보이며 그들의 수준 높은 문화 안목을 전한 이 책의 후속편도 오씨는 이달 말께 펴낼 예정이다.

"동·서양 그림의 차이는 그들의 문화·사상의 차이와 같습니다. 서양화는 존재론의 탐구로 질감·음양 등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그립니다. 그러나 동양화는 외형이나 존재가 아나리 내재된 본질적인 기를 포착하려 해요. 한·중·일 삼국의 그림에도 일정한 차이가 있는데 중국의 정교함, 일본의 깔끔함에 비하면 한국화는 거칩니다. 본질적인 것을 큼직하게, 깊이 생각한 것을 대범하고 자연스레 던져놓는 대가 센 그림이 한국화입니다. 이런 전통 미학적 관점에서 지금 한국화 작업을 펼치는 사람은 드뭅니다."

2백년 전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강조했듯 지금 우리 옛 것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의 저력과 연유를 제대로 알려 21세기 선진 문화민족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씨는 누가 알아주든 말든 우리 문화 전도사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이경철 문화전문 기자

bacch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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