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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보입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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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당신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새해를 맞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 때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른바 잘 나가는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왠지 모를 불안감과 걱정 속에 을유년 새해를 맞았을 것이다. 2005년 1월 서울의 거리에는 희망을 잃어버린 군상(群像)의 쓸쓸한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다.

메추리알과 건빵 몇 개로 만든 결식아동용 도시락의 비참함 속에서 삼성전자가 순익 100억달러 클럽에 합류했다는 뉴스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외국계 사모(私募)펀드인 뉴브리지 캐피털이 헐값에 인수한 제일은행을 다른 외국 자본에 되팔면서 1조1500억원의 이익을 챙겼다는 보도는 우리를 더욱 무력하게 만든다.

위기감과 불확실성이 팽배할수록 사람들은 생존본능에 매달리게 된다. 서점엔 취업.처세.이재.창업에 관한 책들이 넘쳐나고, 직장마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인간관계는 갈수록 피폐해지고, 사회는 천박함을 더하면서 품격을 잃어가고 있다. 서로를 보듬어 주던 인간적인 정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마지막 보루여야 할 가정은 오히려 해체 위기를 맞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주류와 비주류의 격차 해소를 기치로 내건 노무현 정권 3년차의 서글픈 현실이다.

지난주 연두 기자회견에서 노 대통령은 시종일관 경제에 대해 말했다. 경제 살리기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약속했다. 현재의 암울한 경제상황에 대한 그의 문제 인식은 대부분 정확한 것 같았다. 산업 간, 기업 간, 계층 간 양극화 현상에 대한 그의 진단도 틀리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그의 말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가 경제에'올인'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문제는 구조적이다.

8년 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벗었다.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미명 아래 신자유주의의 절대가치인 개방과 자유화는 선(善)이 됐다. 국적과 성격을 불문하고 외국 자본에 안방을 내주면서 들어온 돈이 150조원이다. 뉴브리지 캐피털과 론스타에서 보듯 한국은 투기자본의 사냥터고 놀이터가 됐다.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은 국내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주주 이익 극대화가 기업들의 사명이 되면서 이윤 창출이 지고지선의 가치가 됐다. 고용 창출은 뒷전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있던 사람도 잘라내는 판이다. 거리는 청년 실업자들과 조기 퇴직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개혁 강박증에 매몰돼 자신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신자유주의에 발목이 잡혀 있다.

우리 경제는 흔히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돛단배에 비유된다. 아직 튼튼한 엔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파도가 높아지고 폭풍이 불면 뒤집힐 수밖에 없다. 서로 배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하지만 배가 한 번 요동칠 때마다 한 무리씩 떨어져 나가고 있다. 달러화 약세라는 또 하나의 거센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세계화의 흐름을 거부할 도리는 없다. 하지만 그 부작용을 줄이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정부는 배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에 대한 구조와 재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기업들은 아무리 각박하더라도 종업원을 인격과 품위로 대할 줄 알아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각자 자기 브랜드를 통해 몸값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씁쓸한 얘기지만 적자생존은 외면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배명복 국제문제담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