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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저준위 원전센터 부지 투명한 절차 통해 선정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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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제 을유년 새해가 밝았으니 정부가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을 추진한 지도 벌써 19년이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 19년을 자랐으면 벌써 장성했을 나이인데도 방폐장 부지 선정은 아직도 한 발짝을 못 나가고 있으니, 이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러다가 원자력 발전을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국민께 송구할 따름이다.

정부는 지난 한 해 동안 부지 선정에 있어 절차적 민주성과 주민의 참여를 높이고, 시민사회단체와도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등 부안에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15일 예비신청을 한 지자체가 한 군데도 없음에 따라 이러한 정부의 노력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역주민이 요구하는 안전성에 대한 믿음과 시설을 유치하면 지역이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값싸고 깨끗한 전기를 제공하는 원자력발전에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 처리는 우리 세대의 책임이라는 원론적인 점만 강조한 것이 실패의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지난해 12월 17일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에는 정부의 이러한 반성이 담겨 있다. 안전성 면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중저준위폐기물 처분장을 분리해 우선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장은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작업복.장갑.폐필터와 병원.산업체에서 발생하는 방사선이 낮은 폐기물을 영구처분하는 시설이다. 여기서 나오는 방사선량은 연간 1밀리시버트로 1회 X-선 촬영의 10분의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안전성에 문제가 없으며 주변 생태계에도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으로 입증됐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40년 이상의 운영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31개 원자력 발전국 중에 중저준위폐기물 처분장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대만.슬로베니아.벨기에.네덜란드 5개국뿐이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4개국은 세계 6위의 원자력발전국인 우리와는 달리 원자력의 비중이 낮다. 원자력 발전소가 없지만 병원 및 산업체에서 나오는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한 시설을 운영하는 나라만도 베트남.호주 등 14개국이나 된다.

또한 지역주민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인 중저준위폐기물 처분장 유치지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현금 3000억원 지원과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뿐만 아니라 반입수수료 등이 추가되며 올해 상반기 중에 제정될 유치지역지원특별법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할 계획이다.

한편 학계에서나 국제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용후연료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 국민적 공감 하에 최적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로 하고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장 부지에는 향후에도 사용후연료 관련 시설은 건설하지 않기로 방침을 결정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정부는 올해 에너지기본법이 제정되면 설립될 국가에너지위원회 등을 통해 시민사회단체.지역주민.학계.전문가 등 다양한 계층의 이해당사자들이 모여 사용후연료의 공론화 방안에 대해 숙의할 계획이다.

정부의 이러한 방침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가 과연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신규 방침에서는 그간의 시민사회단체 및 학계의 요구를 수용해 사용후연료에 대해서는 장기적으로 논의를 거쳐 방침을 정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시민사회단체들이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보다 합리적인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의 장에 참여하기를 기대한다.

정부의 정책추진은 투명해야 한다. 특히 전 국민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원자력정책 및 방폐장 부지선정은 더욱 더 그러하다. 정부는 지난해 방폐장 부지선정절차부터 제도로 확립된 절차적 민주성과 주민참여를 통해 정책과정의 투명성을 견지하는 한편, 지역민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수렴해 국민에게 다가가는 정책집행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계획이다. 이제 새로 수립하게 될 중저준위 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 절차에서는 지역주민, 시민사회단체, 각계의 전문가가 모두 참여해 더 이상 국책사업이 표류하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조석 산자부 원전사업기획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