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를 내버려두시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일본이 3년 연속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올해는 화학상과 물리학상을 함께 받는 것을 지켜보는 국내 학계는 여러 감회가 교차하는 모습이다. '부러운 일본, 부끄러운 한국'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수십조원씩을 투자하는 5년 단위 과학기술 기본계획을 추진하며 '과학 강국'을 다지는 일본과 비교할 때 우리 현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연구개발비 투자가 미국의 5%, 일본의 10% 수준에 불과하다. 과학기술인에 대한 사회적·경제적 홀대는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이어진다. 과학기술인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 풍토가 요원한 판에 노벨상을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푸념도 나온다.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글이 지난달 교수신문에 실렸다. 서울대 물리학과 김대식 교수가 '공무원들이여, 연구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시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기초과학 기술자에게 연구비는 생존에 관한 문제고, 연구비의 상당 부분을 제공하는 정부에 연구자들이 목을 매달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공무원들이 어쩌기에 이런 하소연이 나오는지 金교수의 말을 간추려 들어보자.

"공무원들은 표(表)를 매우 좋아한다. 창의력을 발휘해 표의 무한한 변종을 만들어낸다. 연구비 신청서를 쓰며 포복절도하다가 울음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말도 안되는 표를 만들 때다. 거기에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상 학술지를 적으라는 얼토당토 않은 요구까지 한다. 많은 연구자들이 1년에 한번은 '소명자료'를 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가정하고 감사를 하는 지금의 행정체계는 연구자의 사기 저하에 큰 몫을 한다. 잦은 자료 요청 e-메일과 인터넷 업데이트 요구도 연구자를 괴롭힌다. 심지어 집 주소를 부탁한다는 e-메일도 온다. "

金교수는 이런 요구들이 귀찮은 정도를 넘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구에 장애가 되고 있다며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공무원들은 창의력을 좀 줄이고, 연구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된다―.

이에 대해 공무원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국민의 세금에서 나가는 돈을 허투루 쓸 수도 없고, 문제가 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니 시시콜콜 따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관료주의적 생리까지 끼어들면 간섭의 정도가 어떠리라는 것을 경험자들은 다 알 것이다.

물론 연구비를 받은 사람들의 책임도 크다. 건국 이래 최대의 교육관련 국책사업이라는 'BK(두뇌한국)21' 연구비 사용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제기된 잡음이 대표적인 사례다. 2005년까지 7년간 매년 2천억원씩 모두 1조4천억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 덕분에 대학의 연구 여건이 좋아지고 가시적인 성과가 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선 인건비를 허위 지급하거나 연구비를 관광비·휴가비 등으로 '눈먼 돈' 쓰듯 흥청망청 쓴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3년간의 사업실적 중간평가에서 탈락하거나 연구비를 삭감 당한 사업단이 줄줄이 나와도 할 말이 없게 돼 있다.

돈이 가면 간섭도 따라간다. 그렇다고 그 간섭이 연구자를 괴롭히고 연구에 방해가 될 정도라면 문제가 있다.

공무원의 간섭은 적을수록 좋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선 우리 학계에 투명한 연구비 집행 풍토가 하루 빨리 정착돼야 한다. 사전 엄격한 심사로 연구비 지급 대상자를 선정하고, 그 이후엔 연구자에게 맡겨버리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엔 얼마전 '국가의 개입과 노벨상 수상은 반비례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글은 정부의 개입과 관료주의를 배격하고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환경이 천재를 길러낸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노벨상 과학분야 수상자 가운데 미국의 대학 연구소 출신이 많고 유럽이 몰락한 사례를 들었다. '관료주의와 천재는 섞일 수 없다'는 지적에 우리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