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류 생태주의는 가라" 북친 對 김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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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여부를 떠나 전투적 성격의 글 자체가 한 매력을 단단히 했던 책이 지난 주 소개했던 머레이 북친의『휴머니즘의 옹호』(민음사)였다. 무협지 식으로 말하면, 그 책은 현대사상의 무림(武林)에 홀연히 나타난 지존(至尊)의 글이다. 스스로 자랑하듯 독설·야유로 뭉쳐진 현란한 문체를 휘두르며 북친은 강호의 고수들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베어버린다.

그 지존의 소속은 에코 아나키즘(생태 무정부주의). '위기에 빠진 인간과 휴머니즘 구하기'야말로 그가 표방하는 최고의 이념이다. 생태위기를 걱정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지금의 서구 지적 풍토는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자연계에 붙어있는 암세포"정도로 규정하기에 이른 반(反)휴머니즘, 그의 표현대로 역거운 지적(知的)파산의 징후들과 맞서 북친은 나홀로 싸운다.

가이아 이론을 들먹이는 유사(類似)신비주의, 카프라가 유포시켰던 동양사상들, 몽롱한 뉴 에이지,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북친이 겨냥하는 대상들이다. 하지만 북친의 칼춤은 좀 덜 미덥다. 그리고 거칠다. 오죽하면 책 번역자인 동국대 구승회 교수마저도 북친을 20세기말에 부활한 과격 마르크시스트 바쿠닌이라며 고개를 내저을까. 그러나 북친은 리트머스 시험지다. 우리 시대의 화두 생태주의 사상에 섞여있는 옥석을 가늠해볼 좋은 잣대다.

당장 지난 주 『김지하 사상전집』(전3권·실천문학)을 펴낸 시인 김지하를 한번 검증해 보자. 이웃사촌 격의 사상에 속하는 생명주의(김지하)-생태주의(북친)라지만, 두 지존은 뚜렷하게 구분된다. 북친으로 말하면 10대 시절부터 미국 좌파운동에 뛰어든 노장.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면서 아나키즘을 키워왔다가 생태주의로 개종한 게 무려 반세기다. "생태문제란 사회 구조개혁 없이 해결 불가능하다"는 인식도 왕년의 좌파답다.

김지하는 우리가 잘 안다. 반정부 시인에서 출발해 해월(海月)·증산(甑山) 재발견에 이어 생명사상·율려(律呂)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의 궤적은 현대사의 곡절과 잇닿아 있다. 그 증거물이 철학·미학·사회 사상에 이르는 묵직한 전집이다. 앞으로 김지하 연구와 비판도 이 정본을 토대로 이뤄져야 옳겠지만, 북친의 『휴머니즘의 옹호』에 나오는 독설을 한번 들이대 보자. 결과가 흥미롭다.

"아류 생태주의는 몸에 해로운 만병통치의 비책(秘策)을 찾으려 한다. 그들은 먼 과거의 신화적 정신성에 의지하던 직관주의를 찬양한다. 그것은 인간 이성을 부정하고 범신론적 '우주적 자궁'에 스스로 파묻혀 몽롱해진 결과가 아닐까?"(18쪽 발췌) 생태주의 일반에 퍼부어진 북친의 독설이 김지하에 대한 기존 국내에서의 일부 비판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있다.

사실 최근의 김지하는 신비주의·직관주의 색채를 짙게 하고 있고, 특히 단군과 한민족의 초(超)고대사를 거론하면서 쇼비니스트의 막다른 골목을 찾아들었다는 지적을 듣는다. 매번 자신의 기존 사상을 부정· 단절하면서 새 메뉴를 들고 나왔지만, 그것이야말로 자기 모순이다. 늘 전위에 서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새것 콤플렉스'를 부추겼고, 정교함을 잃었을 것이다. 3년 전 남의 생각을 차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율려사상이 사회적 물의로 연결된 것도 그 맥락이다.

그러면 앞으로 김지하가 보여야 할 행보는 명쾌해진다. 더 이상 새로운 그 무슨 사상을 자신의 마술 모자 속에서 꺼내보일 생각은 금물이다. 따라서 오래 궁구(窮究)해온 생각들을 실로 꿰는 정리과정이 필수고, 그 뒤에야 그가 생각해온 신 르네상스 운동 같은 것을 전개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느긋한 행보만이 "구름 똥 누고 다니는 신선"이라는 세간의 비아냥을 막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물어보자. 누구 말대로 김지하 정도라면 한번 우주를 삶아먹고 싶은 원력(願力)을 가질 법하지 않을까. 앞서 '북친 대(對) 김지하'라는 대립틀을 만들어보았지만, 서구 계몽주의의 아들 북친과 달리, 김지하는 제3세계 우리의 시인이다. 그런 시인이 대학가에서 수입학문에 코밖고 있는 것과 다르게 '우리 시대의 생각'을 품어왔다면 그것은 일단 우리 시대의 정신적 자산이 아닐까 싶다. 그의 전집 출간에 반가움부터 표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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