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조용한 '미국 달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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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을 전후 해 홍콩신문에는 재미있는 사진이 한 장 실렸다. 중국 경제의 실권을 쥔 쩡페이옌(曾培炎)국가발전계획위 주임이 지난 21일 뉴욕에 건너가 미국의 정·재계 인사들과 '중·미 경제무역 합작 항목 계약식'을 갖는 모습이다.

양국의 내로라 하는 13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참석해 47억달러(약 6조1천억원)에 이르는 프로젝트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를 통해 중국석유화학(Sinopec)과 중국연통(차이나 유니콤)·칭타오(靑島)맥주 등 중국의 간판급 국유기업들이 미국 기업과 손을 잡았다.

얼핏 보면 江주석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주는 '방미 선물 보따리'라는 느낌을 준다.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인권·종교 탄압 시비와 대만 문제, 미사일 수출문제 등으로 껄끄러운 처지다. 다음달 있을 공산당 제16기 전국대표대회가 끝나면 권력 일선에서 물러날 예정인 江주석은 이런 문제들이 부각되는 걸 원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이번 '미국 사주기(Buy America)'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딴판이다. 중국은 올해 세계무역기구(WTO)가입과 함께 취했던 관세인하·시장개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대미 무역흑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중국 세관측의 집계로만도 지난 8월 말까지 2백59억달러의 막대한 흑자를 올렸다. 미 상무부 통계로는 흑자규모가 5백억달러를 넘는다. 당연히 양국의 정상이 만나면 통상문제로 얼굴을 붉힐 상황이다.

그러나 미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의 고위관리들이 올들어 뻔질나게 베이징(北京)을 드나들면서 무역역조 시정을 요구하자, 중국측은 "양국의 산업발전 단계가 달라 생기는 문제"라고 여운을 남겼다. 그 대신 무역역조의 해법으로 미국 기업에 대한 '대규모 프로젝트 발주'를 복안으로 잡아놓고 조용히 물밑거래를 시작했다. 중국의 조용한 '미국 달래기'를 보면서 대중국 무역흑자가 적지 않은 한국의 협상카드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홍콩=이양수 특파원

yaslee@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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