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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위대한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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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지난 23일 오후 6시 서울 논현동 한국PR연구원 지하 1층 강의실. 어스름이 짙게 깔리면서 대기업·벤처기업 홍보실 직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지난 16일 개강, 8주 동안 진행하는 '위기관리 전문가 과정'을 듣기 위해서다.

이날 김경해 커뮤니케이션 코리아 사장은 "1등 기업이 한순간 위기관리 실패로 10등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강의했다. 이어 그는 "기업이 위기에 닥쳤을 때 모른 체하면서 숨기거나 회피해선 절대로 안된다"며 "적극적으로 위기를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0년대 중반 미국 사례도 소개됐다.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오크트리 우유회사의 얘기였다. 어느날 이 회사의 공장 한 곳에서 불이 나 전소됐다. 이 회사의 우유를 먹는 롱아일랜드 주민들은 당연히 다음날 우유가 배달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이 우유가 배달됐다. 작고 예쁜 편지 한통이 같이 들어있었던 게 다른 점이었다. 사장 명의의 이 편지엔 "어젯밤 불이 났지만 우유 생산과 배달에는 지장이 없다"면서 "앞으로도 고객의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러한 순발력은 평소 위기관리에 대한 훈련이 안돼 있으면 나올 수 없다는 얘기도 덧붙여졌다.

기업 홍보맨들이 '위기관리(crisis management)'를 배우기 시작했다. 사회봉사나 신제품 개발 등 좋은 얘기로 조금씩 국민에게 점수를 얻었다가도 위기관리를 잘못해 한순간에 쌓은 점수를 다 날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홍보실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수많은 위기상황에 가장 먼저 부닥치는 부서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 참여한 LG홈쇼핑 이혜영 과장은 "그동안 기업에 불리한 기사가 나오면 어떻게든 보도가 안되도록 막는 데 급급했다"면서 "이 과정에서 위기시 홍보맨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은 이제 시작 단계=미국식 위기관리 경영은 이제 시작이다. 지난해 고신대 신방과 유종숙 교수가 조사한 '한국 1백대 기업의 위기관리 매뉴얼 보유현황'에 따르면 13개사만 매뉴얼을 갖고 있을 뿐이다.

국내 기업 중에는 그나마 항공회사들이 위기관리에 적극적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수년전 미국 보잉사의 위기관리체제를 벤치마킹, 위기관리 매뉴얼·시스템을 만들었다. 홍보실과 각종 안전관리 부서에서 숙지하고 있다. 이 회사 조영석 홍보과장은 "위기가 발생하면 사장 직속으로 위기관리팀이 바로 조직된다"며 "1년에 3∼4회 위기관리 매뉴얼에 따라 모의 훈련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도 비슷한 위기관리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밖에 한국전력이 핵폐기물 문제가 불거지면서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들었고, 삼성·LG그룹 일부 계열사와 제일은행 등 외국자본이 투자한 회사들이 위기관리 대처 방안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매뉴얼을 활용한 위기관리는 아직 초보 수준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위기관리 매뉴얼이 있어도 위기상황에 들춰보는 경우는 드물다"면서 "아직도 인맥이나 기존 경험 등을 살려 위기에 대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홍보맨들을 대상으로 한 위기관리 강좌도 이번이 처음이다. 강사는 미국홍보협회가 인증한 홍보전문가(APR) 자격증 소지자들이 주로 맡고 있다. APR 자격증은 국내에서 6명이 갖고 있다.김경해 사장·서강대 신호창 교수·홍보대행사 코콤의 김장열 사장·㈜SK 김정기 홍보과장·샐러먼스미스증권 이현정 홍보과장,홍보대행사 KPR의 오경림 부장 등이다.

그런 가운데 위기관리 홍보의 중요성은 확산되고 있다. 한국타이어 홍보팀 김성중 대리는 "위기상황 때 대처하는 방법을 매뉴얼화하고 이를 평소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벤처기업인 로커스는 올해부터 홍보실 직원은 무조건 위기관리 과정을 의무적으로 이수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주한 외국기업은 진작 체계화〓주한 외국계 기업들은 이미 모회사와 마찬가지로 위기관리체제를 갖춰놓고 있다. 비상사태에 대비한 시나리오식 대응체제와 비상 전산 백업시스템 등이 마련돼 있다.

한국바스프는 지난해 미국 테러 사태가 발생한 뒤 10여시간 내 독일 본사에서 긴급 통지를 받았다. 공장 폭파 위협에 대비한 조치와 건물에서의 후송·응급·통신수단 확보 등 대응조치를 하고, 싱가포르 소재 바스프 아시아태평양지역 위기관리센터와 긴밀하게 협력하라는 내용이었다. 바스프의 '위기관리 종합 경영계획' 프로그램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한국바스프는 또 본사 지침에 따라 재무·홍보·법률·안전·환경·기술·의료 부문 책임자들로 구성된 위기관리그룹이 비상사태 발생 때 이에 대처해 의사결정을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듀폰 한국지사도 미국 테러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 아침 위기관리팀을 소집해 직원들의 안전·보안 등에 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듀폰은 위기상황을 3단계로 나눠 단계마다 별도의 대응 매뉴얼을 갖춰 놓고 있다. 예컨대 가장 긴급한 상황인 3단계 상황이 발생할 경우 모든 직원은 무전기를 휴대하고 정해진 장소로 집결해 대응방안을 논의한다. 1년에 한번꼴로 위기관리를 위한 모의 가상훈련도 실시하고 있다. APR 자격증을 갖고 있는 오경림 부장은 "대부분의 미국 기업홍보실은 위기관리 매뉴얼을 갖고 있고 평소 모의훈련을 통해 숙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태진 기자

tjkim@joongang.co.kr

위기관리란

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에 대비한 매뉴얼화 작업과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모의훈련을 말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평소 훈련한 대로 그 영향을 최소화하고 정상적인 상황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미국에서는 위기관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고 있다. 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 바로 위기관리 매뉴얼이다. 객관적이고 체계화된 위기관리 매뉴얼이 만들어지면 그 매뉴얼에 따른 반복훈련(시뮬레이션)을 실시, 미처 찾아내지 못한 돌발요인과 시행착오를 교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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