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있는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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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흰 달빛/자하문(紫霞門)

달 안개/물소리

대웅전(大雄殿)/큰 보살

바람소리/솔소리

범영루(泛影樓)/뜬 그림자

흐는히/젖는데

흰 달빛/자하문

바람소리/물소리

-박목월(1916∼78) '불국사(佛國寺)' 전문

각 연 2행 8연의 시를 연 구분 없이 옮겨 보았다. 이 가을 홀로 떠나 불국사 마당에 나도 이 시처럼 명사형으로만 서있고 싶다. 명사형의 자유로움이여. '앙상한 등나무, 늙은 나무, 저물녘 까마귀,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사람 사는 집. 옛길, 가을 바람, 비쩍 마른 말. 석양은 지고, 애끓는 사람은 하늘가에'.(정민 옮김) 원(元), 마치원(馬致遠)의 사(詞) '추사(秋思)'다. 일찍이 그도 이렇게 가을날을 명사형으로 읊었다. 가을은 모든 수식어를 지운다. 그러나 그 빈자리가 왜 이리 깊은가.

정진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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