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카노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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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와 개혁의 움직임이 소련군을 주축으로 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개입으로 좌절된 것은 1968년 봄이었다.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는 체코의 개혁정책이 공산블록의 안정을 파괴할 우려가 있다며 '바르샤바 조약'의 집단안보조항을 근거로 해 무력개입을 단행했다.

세계는 경악했고 '프라하의 봄'을 짓밟는 무력도발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반대 데모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항의의 목소리는 유럽에 또다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더 큰 공포와, 소련군의 탱크가 프라하 시내를 질주하면서 일으키는 포연과 굉음에 묻혀버렸다. 프라하의 지축과 자유는 이렇게 뒤흔들려버렸다.

크렘린의 성벽 뒤에 숨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등 정치인들이 이렇게 음험한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을 때 성벽 밖, 붉은 광장에선 후일 소련체제를 뒤흔들어 버릴 목소리들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콘스탄틴 바비츠키를 위시한 7명의 소련지식인들이 소련군의 프라하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를 붉은 광장에서 벌인 것이다. 소련의 인권, 양심수 운동은 이때를 계기로 본격화했다.

바비츠키의 부인으로 당시 그와 함께 붉은 광장에 달려갔던 나탈리야 벨리카노바는 곧바로 민권단체인 '인권보호그룹'창설에 참여했고 '삼이즈다트'(자유출판운동)의 적극적 활동가가 됐다.

벨리카노바 여사의 인권운동은 반소(反蘇)체제 투쟁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권리에 대한 억압에 항의하는 진정한 인권운동이었다. 때문에 시민들과 소수민족들로부터 더 높은 평가와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소련 당국은 수차례의 협박과 연금 끝에 79년 반소캠페인 혐의로 그녀를 체포한 후 9년형을 선고했고 다시 카자흐스탄의 황무지로 추방했다.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그녀가 당시 소련 당국에 요구한 것은 성경책과 손자의 사진뿐이었다고 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해 인권운동가들의 복권을 지시하면서 벨리카노바 여사도 모스크바에 귀환했다. 원래 수학자였던 그녀는 '미래의 희망인 학생들과 끝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해 지난달 19일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의 한 학교에서 조용히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녀가 죽은 지 한달, 축축한 겨울비가 내리는 그녀의 모스크바 아파트에는 죽음을 애도하는 이름 모를 꽃다발이 걸려 있다. 그녀의 명복을 빈다.

김석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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