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굽고 귀도 절벽인 노승이
누덕옷 속에
길을 모두 감추고 떠나버려서
그곳으로 가는 길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 일찍 뜬 달이
둑 위 가랑잎과 누워 섹스하는 모습만
훔쳐보고 돌아왔다
-이성선(1941∼2001) '도피안사(到被岸寺)' 전문
이제 거기 당도해 있는가. 성선(聖善)이 그립다. 실제로 도피안사는 강원도 철원군 동성읍을 지나 북으로 한 삼십여 분을 달리다 보면 거기 산자락에 숨어 자리하고 있기야 하지만 거기엘 가보셔도 성선은 없다. 실은 그리로 가는 길도 없다. 노승이 지운 것이 아니라 성선이 시로 지워버렸다. 마침내 번뇌를 벗은 당신의 마음속에나 한 채 절은 태어나기 때문. 그러나 이 시가 시가 되는 묘법(妙法)은 한 덩이 달이 가랑잎과 섹스하는 그 원융 합일의 엑스터시.
정진규 <시인>시인>